자고, 달리고, 먹고
2025년 10월 8일 수요일, 퀘벡 9일 차.
오늘 비 예보가 있어서 저녁 6시에 집 근처에 L'Affaire est ketchup라는 식당을 엊그제 미리 예약해 뒀다. 놓칠 수 없는 비 오는 올드퀘벡 사진을 좀 찍고, 저녁을 먹으러 갈 예정이었다.
알람 없이 정오가 다 되어서 눈을 떴다.
세상에.. 이런 좋은 날씨가 없다.
며칠 전부터 비 온다고 날 잔뜩 설레게 하더니..
캐나다 기상청 체육대회엔 분명 비가 올 거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화창할 줄 알았으면 어제 비 오는 올드퀘벡을 보러 갔을 텐데.. 분했다.
뭔가 하기도 조금 애매해서 얼마 전 산 조끼를 테스트해 볼 겸 조깅을 하려고 나섰다. 퀘벡시티 마라톤에서 받은 메달 속 건축물 앞에서 사진도 찍으려고 메달도 챙겼다.
18시간 정도 공복상태라 조금 허기가 졌지만, 소화시키고 뛰면 조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질 것 같았다. 결국 청포도 사탕하나와 물을 챙겨서 빈속으로 집을 나섰다.
다른 글에서 이미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숙소에서 올드퀘벡까진 극한의 오르막이었다. 올드퀘벡까지 조깅을 하게 되면 그 근처는 보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와야 할 게 분명했다. 퀘벡시티 버스 시간표 어플로 버스시간을 확인한 후 집을 나섰다. 덜덜 떨며 5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볼 때마다 새로운 올드퀘벡 버스장류장에서 하차를 했다.
그늘이 많던 숙소 근처와 다르게 햇볕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영상 7도 정도의 맑은 날씨.
정말 달리기 좋은 날이었다.
김진표의 <유난히>라는 노래의 첫 구절과 딱 맞는,
“유난히도 따뜻한 기분 좋은 오후”였다.
버스정류장과 가까운 로얄광장부터 도깨비언덕까지 슬슬 조깅을 했다. 극도의 오르막이라 빨리 뛰고 싶어도 뛸 수 없었다. 단풍, 햇살, 바람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완벽한 날이었다. 중간중간 멈춰서 사진도 찍으며 쉬엄쉬엄 달렸다.
예전엔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면 안 될 것 같아 좋은 풍경이 있어도 그냥 지나쳤었다. 대회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부귀영화를 달리기로 누리겠다고… 요즘엔 놓치기 싫은 풍경이 있으면 멈춰서 사진으로 기록한다. 덕분에 달리는 게 더 행복해졌다.
도깨비 언덕을 지나, 첫날 도깨비 언덕으로 착각하고 잘못 갔던 알브라함 평원으로 갔다. 건너편 레비스가 한눈에 보였다. 엊그제 한번 다녀왔다고, 뭔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올드퀘벡은 경사가 급하다 보니 내리막길도 쉽지 않았다. 무릎이 원래 시원치 않은 나는, 내리막길을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속도를 낮춰 더 쉬엄쉬엄 부담 없이 달렸다.
메달 속에 나온 성곽 같은 곳에서 메달과 함께 사진과 영상을 몇 개 찍었다. 혼자 찍으려니 계속 메달과 건물의 포커스가 안 맞아서 고생했다. 찍기 전엔 이 성곽이 메달 안의 그곳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찍다 보니… 뭔가 기둥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TMI: 다음 날 진짜 메달 속 성곽을 찾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도깨비 분수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버스 정류장을 찾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슬슬 뛰어가는 게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이라 속도만 천천히 해서 간다면 무리는 없을 듯했다.
숙소 근처에 세시쯤 도착했다. 공복에 나가서 한참을 뛰었더니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다. 숙소 바로 뒤에 첫날 식빵을 샀던 그곳에서 빵하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셨다. 조깅한 후라 그런지 정말 너무 맛이 있었다.
샤워를 하고 조금 쉬니 벌써 저녁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주말의 그 더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코트를 입어도 꽤나 쌀쌀하다고 느껴졌다.
L'Affaire est ketchup라는 레스토랑도 꽤나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이런 레스토랑은 처음이라 가격대는 어느 정도인지, 코스로 시켜야 하는지 등등 미리 조사를 하고 예약을 했다. 조사를 마친 후, 나의 계획은 와인 한잔에 메인요리 하나만 먹을 생각이었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했고, 일단 화이트 와인 한잔을 시켰다. 웨이터는 6시에 손님들이 모이면 한 번에 메뉴를 설명해 준다고 하며 와인을 먼저 줬다. 6시가 되자 웨이터는 홀 한가운데에서 오늘의 메뉴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모두 마친 후 그는 내 테이블부터 주문을 받으러 왔다.
“애써 내색할 순 없어. 이번이 처음이지만.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 하고 있어
이럴 땐 침착해 좀 자연스럽게”
거북이의 <비행기> 가사이다.
낯선 식당에 가면 나도 모르는 무언가에 휩쓸려 머리와 입이 따로 놀 때가 있다. 나는 애피타이저로 타르타르, 메인으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첫 주문부터 계획에 어긋났다.
먼저 타르타르가 나왔다. 생고기에 마요네즈가 섞인 소스 그리고 바삭한 후레이크 같은 무언가가 얹혀 나왔다. 미친듯이 맛있었다. 후레이크와 생고기가 어울려지니 식감도 재미있었다. 아마 여기서 이성은 잃은듯하다. 내 단점 중 하나는 맛있는 음식은 술과 함께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타르타르와 잘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받아 한잔을 더 마셨다.
아까 빵을 먹어서 그런지, 애피타이저만 먹었을 뿐인데 배가 차기 시작했다. 더 천천히 와인과 함께 먹고 싶었는데, 어느새 다른 테이블들은 애피타이저를 다 끝낸 상태였다. 곧이어 스테이크가 나왔다. 함께 가니쉬로 나온 구운 양파, 비트, 당근, 호박은 진짜 환상적이었다. 스테이크엔 아무래도 레드와인이 잘 어울리니까 레드와인을 한잔 더 시켰다. 배가 불러 죽을 것 같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며 천천히 다 먹었다.
웨이터는 디저트를 주문할 건지 물어봤다.
“애써 내색할 순 없어. 이번이 처음이지만.”
내색 안 하려다 나도 모르게 치즈케이크 디저트를 시켰다. 진짜 배가 불러 더 이상 들어갈 곳도 없어 보였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디저트를 주문하겠냐는 질문을 거절하기 힘들 때가 있다.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먹어야 할 것 같은 그럼 기분. 묻지 않으면 절대 시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와인 4잔,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
여기에 팁 18프로 포함 총 170불.
한 끼에 혼자 170불을 태우다니…
마지막 디저트는 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술은 왜 네 잔이나 마신 거야?
그치만 너무 맛있게 먹었는 걸?
주말에 친구 부부가 퀘벡에 같이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전까지 가난하게 살아야겠다 생각하며 가격을 잊기로 했다.
레스토랑 밖을 나오니 공기는 더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살짝 오른 취기 때문인지 조금 상쾌하게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너무 맛있고 뛰어난 경험이었다.
나중에 엄마와 퀘벡시티에 오게 된다면, 그때도 기꺼이 다시 경험해보고 싶을 만큼.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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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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