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퀘벡시티에서 미타임 48 시간

열흘 만에 퀘벡시티 마스터

by Hiraeth

2025년 10월 9일 목요일, 퀘벡 10일 차.


미타임(me time)이라는 말이 있다.

“나 혼자만의 시간, 나를 위한 휴식 시간”으로 순수하게 내가 쉬고, 충전하고, 좋아하는 걸 하는 시간이다.


퀘벡시티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캘거리 친구부부에게 시간이 되면 놀러 오라고 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고 순도 200프로 진심으로 한 제안이었다. 총 15일의 여행 중, 마지막 3박 4일을 그 친구들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원래 현지인들은 친구도 초대하고 그런 거 아닌가? (비록 현지인처럼 사는 건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으나…)


그 친구들이 오기까지 미타임이 이틀이 남았다. 친구들과 함께 공유할 퀘벡시티가 기다려졌지만, 한편으론 이 여행이 끝나간다는 게 실감이 나서 살짝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포근한 침대 속에서 꾸는 달콤한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퀘벡시티에는 번화가가 크게 세 구역이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올드퀘벡, 숙소 근처였던 생록, 그리고 아직 제대로 가보지 못한 Saint-Jean-Baptiste(생장밥티스트)다. 두 군데는 여러 번 다녔으니, 오늘은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생장밥티스트 지역을 쭉 걸어볼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올드퀘벡 정류장이 아닌 두 정거장 전에 내렸다. 이곳은 버스를 탈 때마다 눈여겨본 곳이었다. 올드퀘벡에서 아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거리가 엄청 한산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살 때문에 날이 딱 좋았다. 오늘 걸은 곳은 온통 상점들뿐이었다. 천천히 상점과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251019000004130012.jpg 오늘 내린 버스정류장 뷰
002.png 텅 빈 거리와 건물 위 재밌는 직장인
003.png 건물 다르게 찍어보기
004.png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는 올드퀘벡
005.png K 드라마의 위엄 - 가짜 도깨비문과 크리스마스상점


토론토에선 1달러짜리 맥도날드 커피를 마실까 말까 매일 아침 고민한다. 근데 어째서! 왜! 여행만 오면 큰돈도 토론토의 1달러보다 싸게 느껴지는지… 하마터면 몇백 불을 쓸 뻔했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나와서 다음 상점에 가고, 다시 또 이성과 사투를 벌이다가 다음 상점에 가고를 반복했다.


006.png 지갑을 두드리던 기념품들


어제 과식 때문에 속이 불편해서 빈속으로 나와 한참을 걸었더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해도 어느새 구름에 가려져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혹시 몰라 전에 저장해 두었던 어니언수프 맛집리스트를 살펴보니 근처에 하나가 있었다. 마침 집에 가는 방향이기도 해서 따뜻하게 한 그릇하고 집에 마저 걸어가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가다 보니 큰 사거리에 어디서 많이 본 성벽 같은 게 있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 메달에 있는 그곳이구나”


St. Jean Gate(생장문)이라고 한다.

IMG_3290.JPG 마라톤_메달_그곳_진짜_최최최종


어제 엉뚱한 곳에서 사진 찍는다고 헛짓거리를 한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아마 오늘 여길 지나가지 않았으면, 어제 그곳이 메달 속 성벽이라고 영원히 믿었을 거다. 이런 걸 보면 어쩌면 진실보단 내가 믿고 있는 게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 무섭기도 하다.


오늘은 메달을 안 가져와서.. 대충 성벽만 찍고 얼른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성벽의 진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을 쉬지 않고 걷다 드디어 식당 코 앞에 다다를 무렵.. 파타고니아 매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퀘벡이 토론토보다 택스가 비싼 것을 되뇌며 유혹을 뿌리치고 식당에 드디어 도착했다.


일단, 어니언수프를 시키고 메뉴를 찬찬히 살펴봤다. 레스토랑은 스포츠바 분위기인데 크레페전문점이었다. 그런데 어니언수프가 맛있다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들이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사발만 한 컵에 수프가 한가득 나왔다. 이곳도 집 근처만큼이나 맛이 있었다. 쪽파가 올라가서 그런지 뭔가 뜨끈한 국을 먹는 것 같았다. 수프를 먹으며 식당의 구글리뷰를 훑어보았다. 어니언수프 맛집 리스트는 한국 블로그나 사이트가 아닌 레딧에서 영어로 검색해서 찾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리뷰가 영어권 사람들이었다. 대충 사진만 보며 스크롤을 내리다 한국어 아이디가 눈에 띄었다.


“어니언 수프 먹고 진짜 맛있다 했는데, 레몬 커드 크레페가 찐이었어요. 퀘벡 여행 중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


레몬 커스터드 크림이라니.. 뭔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치만 한국인은 맛잘알인걸? 시킬까 말까 고민을 하며 레몬커드 크레페를 검색해 리뷰를 보았다. 모든 리뷰가 다 좋았다. 수프를 먹는 도중 추가 주문을 했다. 서버는 어제 그 메뉴가 솔드아웃 되었다며, 지금 가능한지 주방에다 확인을 해보겠다고 했다. 갑자기 먹고 싶은 마음이 막 솟구쳤다.


다행히도 내 앞에 레몬커드 크레페가 도착했다. 사실 나는 크레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돈 내고 사 먹은 적이 40년 인생 딱 한 번뿐이다. 게다가 레몬커스터드라니, 생각만 해도 오장육부 어딘가에서 느끼함이 올라왔다. 어니언수프가 양이 많아서 배가 그리고픈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몬커드 크레페를 순삭 해버렸다.


상큼한 레몬이 커스터드에 느낌을 잡아주었다. 크레페는 내가 먹어 본 크레페 중 가장 쫀득쫀득했다. 내가 지금껏 먹어 본 것은 크레페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레몬커드 크레페가 있었으면 좋겠다.


007.png 어니언 수프와 레몬커드 크레페


여행기를 쓰면서 보통 “아, 맛있었지. 다음에 가면 또 먹어야지”에서 끝난다.

하지만 저 레몬커드 크레페만큼은,

지금 누가 내 앞에 가져왔으면 좋겠다. 당장 너무 먹고 싶다.


배부르게 먹으니 피곤이 몰려왔다. 배가 든든하게 채워졌지만 여전히 춥고, 손도 시렸다. 당장이라도 우버를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제 그렇게 먹는 데 돈을 쓰고 오늘 디저트까지 먹었는걸? 15분만 걸어가면 아낀 우버비로 다른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고 날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하는 여행은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나 자신과의 사투다.


걷다 보니 모르는 풍경이 보였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예뻤다. 걷지 않았으면, 영영 못 봤을 거다. 그런 낯설고 예쁜 길을 몇 번 지나지도 않아 집에 도착했다. 역시 걷길 잘했다.


008.png 집으로 가는 길, 극한의 오르막길로 안내하는 나쁜 동상


따뜻한 집에 도착하니 피곤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졸다 일어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샤워를 마쳤다. 정신이 좀 들었다.


이 추위에 빈속으로 한참을 떨며 걸었던 게 무리였던 것 같다.

너무 힘들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당장 탄수화물이 필요했다.


최근 릴스에서 유행하는 레시피로 육개장 사발면에 버터와 타바스코를 넣고 먹는 걸 보았다. 마침 숙소엔 모든 재료가 다 있었다. 실패하면 그냥 버릴 생각으로 시도해 보았다. 실패는 무슨.. 너무 맛있어서, 금방 사발면 하나를 국물까지 싹싹 먹었다.


내일모레 캘거리에서 오는 친구들은 5시간씩 하이킹을 가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과 3일간 함께 하려면 내일은 푹 쉬어야겠다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쉬기로 결심한

2025년 10월 10일 목요일, 퀘벡 11일 차.


약간 쌀쌀하지만 이불 안은 따뜻한 잠자기 딱 좋은 온도에서 푹 잤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정오가 넘도록 잤다. 한시쯤 눈을 떠서 샤워를 마쳤다. 집 뒤에 있는 빵집으로 향했다. 오늘까지 세 번째다. 식빵 사러 한번, 러닝 후 한번, 그리고 오늘!


사실 빵에 과일이 올라간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은 뭐에 홀렸는지 블루베리가 잔뜩 올라간 빵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강아지를 데리고 중년의 여성분이 들어오더니 내게 물었다.


“블루베리?”

“네, 하지만 이게 마지막 하나였어요”


그녀는 얼마나 아쉬운지 온 얼굴의 근육을 사용해 표현했고, 나도 내 얼굴의 모든 주름을 동원하여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010.png 오늘의 수프와 내가 솔드아웃 시킨 블루베리 빵


빵을 먹으며 오고 가는 손님들을 관찰했다. 붐벼서 줄을 서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쉴 새 없이 손님들이 왔다. 아, 블루베리가 올라간 빵 역시도 너무 맛있었다. 한국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 달지 않고 맛있었다.


일기를 쓰고 남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다 들이킨 후 밖으로 나왔다. 집에 바로 들어가긴 아쉬워서 집 근처에 있던 상점에 가서 종이테이프를 샀다. 그 옆에 소시지 가게에 들어가서 저녁으로 먹을 핫도그와 맥주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009.png 소시지 가게 필카


세탁기를 돌리며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정말 퀘벡에 와서 정말 제대로 쉬기만 한 날이다.

(이 날 쉬길 얼마나 잘했는지… 는 다음 화에 써야겠다.)


참, 소제목을 "열흘 만에 퀘벡시티 마스터"로 했는데 마스터라고 하기엔 길치가 헤매고, 헤매고, 헤맨 이야기들 뿐이라 좀 허세 같기도 하다. 그래도 헤맨 만큼 더 많이 알아갔으니까! 허세 좀 부리겠다.



어니언수프, 레몬커트 크레페 맛집

https://maps.app.goo.gl/36URbggGYgJg1jvj8


소시지 집

https://maps.app.goo.gl/sbA2jLnb9LCp1U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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