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하마터면 3만 보

18Km 걸어서 퀘벡시티 속으로

by Hiraeth

2025년 10월 12일, 일요일.


퀘벡시티 13일 차.

극기훈련 2일 차.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45분 알람이 울렸다.

퀘벡시티와 캘거리는 시차가 있어서 캘거리 시간으로는 새벽 3시 35분이었다.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일어나서 나가려는 모습에 침대 위에서 헛웃음이 났다.


일단,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한 “쁘띠 샹 플랭” 거리로 목적지를 정하고 집을 나섰다. 밤새 차가워진 공기 때문에 더 쌀쌀하게 느껴졌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가는 길에 분수대와 그 앞에 있는 의사당 건물을 지났다. 막 뜨기 시작한 해가 건물 한켠을 비추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우리에겐 목적지가 있기에 조금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IMG_3417.JPG 그날, 그 시간 의사당 건물


오늘 우리가 간 첫 목적지 “쁘띠 샹 플랭” 거리는 도깨비가 한국과 캐나다를 넘나들었던 빨간 문이 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이 거리 초입에 있는 “목 부러지는 계단”은 이수지가 매번 따라 하는 김고은의 “사랑해요” 장면이 찍힌 곳이다.


길 중간에 있는 진짜 빨간문 앞에 팻말 놓이고, 길 끝에는 관광객용 가짜 빨간문이 하나 더 서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도깨비 문 열쇠고리를 팔고, 거리에 악사들은 도깨비 OST를 연주한다. 이 정도면 퀘벡시티에선 김은숙 작가를 업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다.


001.png 목 부러지는 계단에서 보이는 거리, 빨간문


여하튼, 우리의 전략은 성공을 했다.

아침 7시에는 그 붐비는 거리도 한적했다. 괜히 더 기분이 좋아졌다.


002.png 왼쪽이 아침 7시, 오른쪽 같은 곳 낮시간
003.png 7시에 우리 밖에 없던 길, 낮에 사람에 치여다니던 같은 길
004.png 아침 7시 텅 빈 쁘띠 샹 플랭와 대낮에 붐비는 같은 거리


사실은 이곳이 우리의 메인이 아니었다. 도깨비 문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레비스로 향하는 페리 정거장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내가 1번 버스를 타고 늘 내리던 곳인데 횡단보도 두 개가 있다. 서로 다른 횡단보도에서 ‘페어몬트 샤토 프론테낙’ 일명 도깨비 호텔을 배경으로 영상이나 사진을 많이 찍는 나름 유명한 포토스팟이다.


이미 부지런한 아시아계열 여자 세 명이 영상과 사진을 계속 찍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간 사람들이 몰려오거나 차가 붐비기 시작할 것 같아서 슬슬 조바심이 났다. 드디어 그 사람들이 가고 우리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실 셋다 쫄보라 민폐를 끼칠까 봐 파란불인데도 눈치를 보면 엄청 뛰었다. 이걸 찍으려고 그동안 그렇게 달리기를 연습했나 싶을 정도였다.


001.png


그렇게 뛰어다녔는데, 가만히 서 있으니 차가운 아침 공기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훅 들이쳤다. 추웠다. 친구는 어느새 배가 고파서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따뜻한 커피와 빵을 먹기 위해 광장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구석구석을 함께 사진에 담았다. 우리가 가려던 광장에 위치한 커피숍 옆에는 유명한 벽화가 있었다. 그래도 유명한 곳이고 우리도 관광객이니까 한 장 남기고 가려고 들렀다. 그곳엔 가족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진짜 한 10분이 지나도 안 가고 계속 찍었다.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니 너무 추웠다. 보아하니 그 사람들은 벽에 붙어서 본인들 얼굴만 찍길래 벽화 끝에서 살짝 걸쳐서 우리도 여기 있었다는 흔적의 사진만 남기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001.png 커피숍 가는 길에 찍은 사진들
IMG_3496 (1).JPG 아직도 텅 빈 메인거리


오늘 간 커피숍은 스미스 커피였다. 광장 한가운데 위치한 덕에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엄청난 맛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체인도 있길래 평타는 할 줄 알았다. 하지만 15일간 내가 퀘벡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이 없었다. 크로와상도 종이 씹는 것 같았다. 어떻게 체인이 있는 건지 아직도 의심스럽다.


그렇게 아쉬운 모닝커피를 대충 해결하고 도깨비 호텔로 향했다. 호텔 안에 들어가서 친구들에게 우체통의 존재를 설명했지만, 친구들은 ‘도못알’이다. 도깨비를 안 봐서 잘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내가 계속 설명했으니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도 아닌 그냥 드라마 이야기. 그래도 나중에 한국 친구들이 물어보면 가봤다고 하는 게 좋으니까, 뭐. 라고 합리화를 시켜본다.


우린 도깨비 호텔 앞에 테라스 같은 공간을 지나 도깨비 언덕으로 갔다. 극한의 오르막… 오를 때마다 놀라울 정도의 오르막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오르막이 짧다는 것. 언덕에 도착하니 9시 반이 조금 넘어 있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오긴 했지만, 한낮만큼은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하면 조금 용감해지는 것 같다. 며칠 전에 꼬마들이 하는 걸 보고 부러웠던 게 하나 있었다. 언덕에서 구르는 영상 찍기. 사람도 많이 없겠다 친구와 함께 깔깔대며 찍었다. 어후, 근데 생각보다 구르니까 가속도가 붙어서 무서웠다.


우리가 “계획한” 오늘의 마지막 장소는 도깨비언덕이었다. 계획한 이라고 했지, 오늘 여정이 끝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부턴 정처 없이 발걸음 가는 대로 천천히 즐기는 시간이었다.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표시판을 따라 우스꽝스러운 사진도 찍어가며 걸음걸음을 옮겼다.


001.png 나와 같이 언덕에서 굴러 준,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같이 찍어 준 친구
001.png 건물들 다르게 보기
002.png 퀘벡시티 단풍
003.png 친구가 찍어 준 나
IMG_4341.jpg 친구들과 다니니 인물 사진이 많아졌다

근처에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나는 우버를 타고 숙소로 갔다. 숙소에 들려 식빵도 사다 두고, 우버로 월마트에서 건전지도 배송시켰다. 결국, 나는 카메라 건전지를 챙겨 오지 않은 탓에 왕복 우버비와 딜리버리 비용까지 날린 셈이다. 그래도 카메라 렌즈가 고장 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낫기에 방법이 없었다. 또 친구 커플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면 좋으니까, 나도 좀 쉬면 좋으니까 등등 여러 가지 장점을 동원해 내 멍청비용을 스스로 납득시켰다.


다행히도 배송받은 건전지는 필름카메라와 호환이 되는 모델이었다. 친구 커플이 재미있게 놀 걸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둘만 두고 온 게 마음이 조금 불편하고 미안했다. 식빵도 사서 간식으로 챙기고 30분쯤 쉬다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우버를 타고 갔다.


우리는 저녁엔 레비스에 가서 노을을 보기로 했다. 그전에 주변을 좀 둘러보다가 뭔가 있어 보이는 커피숍에 들렀다. 일본 커피를 추천받았는데 10불이나 했다. 그냥 블랙커피인데 만원이라니…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셔봤지만, 별다를 건 없었다. 맛은 있었으나 가격대비 두 번 먹을 맛은 아니었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 날씨가 정말 쌀쌀했다. 추운 걸 알면서 숙소에서 패딩을 왜 안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부탁해서 퀘벡에 올 때 경량패딩 하나를 가져와 달라고 했다.)


우리는 레비스로 향하는 페리를 타고 내가 가 본 공원에 함께 갔다. 하나 간과한 사실은, 저번에 갔을 땐 한여름처럼 더운 날이었다는 거다. 오늘같이 쌀쌀한 날씨에 강가가 훤히 보이는 그 공원은 더 추웠다. 그래서였을까, 저번에 만난 그 이상한 할아버지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검도를 배웠다던 친구에게 혼내달라고 미리 말을 해뒀는데 조금 아쉬웠다.


커피도 마셨고, 공원이 너무 추워서 화장실을 두 번이나 갔는데 또 가고 싶어졌다. 기왕이면 더 따뜻하고 깨끗한 곳으로 가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터미널까지 달려갔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안전하게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널 안에도 노을이 훤히 보였다. 다만, 유리가 깨끗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어느새 친구들도 도착했고, 우린 페리를 타고 다시 올드퀘벡으로 왔다.


004.png 페리 타고 돌아온 올드퀘벡, 화장실로 달려가는 레비스에서의 나


노을은 언제나 멋있었지만, 전에 혼자 왔을 때만큼 멋진 노을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친구들에게 내가 본 것처럼 더 예쁜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진짜 너무너무 추웠다. 아침부터 추위에서 3만 보 가까이 걸었더니 어느새 우린 모두 지쳐있었다.


오늘 저녁은 친구가 검색해 본 다른 푸틴 맛집에서 푸틴을 포장하고, 저번에 나 혼자 먹었던 피자집에서 피자를 포장해서 숙소에서 컵라면과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친구들도 많이 춥고 힘들었는지 오늘은 우버를 타고 푸틴집에 가는 데에 동의를 했다.


로컬 분위기 물씬 나는 푸틴집에서 기대에 차 푸틴을 포장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슈퍼에서 세븐업도 두 개 샀는데, 7.77달러가 나왔다며 친구가 너무 좋아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좋아했다. 복권이었으면 나도 함께 좋아했을 텐데… 여하튼 마지막 힘을 짜내서 저녁을 포장해서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IMG_3596 (1).JPG 극기훈련 2일 차 저녁


총 29,474보.

다행이다 3만보를 찍지 않았다.

IMG_3912.jpg 쉬지 않고 걸었던 이 날의 기억

따뜻한 오모리 김치찌개 컵라면 국물을 먹으니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푸틴도 정말 맛있었고 피자도 맛있게 먹었다.


평발인 나는 보통 만팔천보 걸으면 호카를 신어도 발바닥 아치가 너무 아파오기 시작한다. 오늘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norda 신발.. 귀여워서 샀는데 진짜 너무너무 만족스러웠다. 여하튼, 오늘 준비한 체력을 모두 소진했다. 우리는 각자 침대에 누워서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새로 산 신발에 대한 극찬을 천만번 더 하며 꿈나라로..)


오늘 하루는 몸도 지치고 추웠지만,

타이밍, 음식, 함께한 친구들 모든 게 어떤 것과도 대체되지 못할 하루였다.



비추하는 광장 안 스미스커피

https://maps.app.goo.gl/SQ5M1stm9fXtVp3c6


친구들이 좋아했던 디저트집

https://maps.app.goo.gl/oqGrBbWVZRaBJnA16


비싼 일본 커피 마신 곳

https://maps.app.goo.gl/JKf1YzYtK3WwFw5w5


맛있었던 푸틴

https://maps.app.goo.gl/P5rWLdq25c5TQRE28


뛰어나진 않지만, 언제든 평타일 수 있는 피자

https://maps.app.goo.gl/rNUe9pxiDUXgcJu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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