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결심하지 못했는데,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보이지 않는 족쇄를 풀다 - 인터넷 변경
2026년 1월 19일, 24개월 약정이 걸려있는 인터넷이 만료되는 날이다.
내가 쓰던 통신사는 Rogers라는 큰 통신사다. 와이파이 공유기를 반납하고 다시 받고 세팅하는 게 귀찮아서 몇 년을 한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할인 플랜을 이용해 왔다. 이전 같았으면 24개월 약정에 묶여서 다른 플랜을 찾아봤겠지만, 역이민을 거의 다짐한 나로서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위약금이 생각보다 꽤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인 없이 매달 지금 플랜을 쓰게 된다면 한 달에 100불(약 10만 원)이 넘는 인터넷 요금을 내야 했다.
마침 다른 통신사(Koodo)에서 한 달 40달러로 6개월 약정. 매력적인 딜이 올라왔다. 6개월 이후엔, 매달 65불을 내면 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이 할인가가 65불인걸 생각하면 경제적으로나 상황으로나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다. 다만, Koodo는 작은 통신사라서 인터넷이 종종 불안정하고, 고객센터가 연결이 잘 안 된다는 후기가 있다. 실제로 동네에 사는 브라질 친구가 고객센터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답답했다.
일단 다른 할인이 있는지 Rogers 홈페이지를 통해 채팅 문의를 했다. 상담원은 모든 할인 플랜이 24개월 약정이 기본이라고 안내했다. 결국 나는 19일을 기점으로 인터넷을 해지해달라고 했다. 상담원은 갑자기 Month-to-month로, 약정 없이 65불에 해줄 수 있다고 협상을 시도했다.
다른 통신사 보다 매달 3만 원 가까이 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나중에 인터넷 해지 때 더 수월한 기존 업체를 유지하기로 했다.
귀찮은 것이 싫어서 유지하는 건데, 귀찮은 일이 생겼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TV 스트리밍 기계를 반납해야 한다는 것.
상담원: 19일이 지난 후, TV 스트리밍 기계를 반납하면 됩니다.
나: 어떻게 반납하죠? 가까운 매장에 가서 반납해도 되나요?
상담원: 택배로 반납해야 해요. 19일 이후에 반납 라벨을 저희에게 요청하면 드릴게요.
나: 저는 이런 귀찮은 일들이 싫어서 당신의 서비스를 변경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기계를 반납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면, 그냥 이번기회에 해지를 할게요.
상담원: 아, 그럼 바로 반납 라벨을 바로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물론 위에 채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AI 만세)
여전히 반납은 해야 하지만, 조금 덜 귀찮아졌다.
앞으로 어떤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져서 이곳에 더 머물게 된다면, 다시 한번 더 싼 장기 플랜을 찾아 헤매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인터넷 약정에서 자유가 되었다.
# 보이는 추억을 기억 속으로 - 레고 정리
2017년 7월 17일,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월급이란 걸 받았다.
학교 다니면서 웹에이전시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 거긴 했지만, 2015년 한국에서 퇴사 한 이후로 2년 만에 내가 스스로 번 월급이었다. 월급으로 팰리스 시네마 레고를 구입했다.
스무 살에 서울로 혼자 올라가 독립을 했지만, 10년 동안 침대와 책상을 놓고 나면 사람 하나 누울 수 있는 작은 풀옵션 원룸에서 살았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방보다 작았다. 옷장도 부족해서 틈만 있으면 옷을 걸어 놓을 수 있게 만들고 살았다. 무언가 꾸민다는 것은 사치였고, 공간도 없었다.
팰리스 시네마 레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독립된 내 공간을 꾸미려고 산 첫 물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소년기에 방 꾸미는 거 제외)
2026년 1월 13일, 나는 조립된 레고를 하나하나 분해했다. 이 레고는 캐나다에서 만난,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의미 있는 만큼 한국에 가져갈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소비나 소유에 대한 개념이 많이 변화했다. 사진으로 남겼으니, 친구에게 주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받아준다고 해서 고마웠다.
무슨 장인처럼 책상에 스탠드를 켜고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붓, 면봉 등으로 먼지를 제거했다. 하…그런데 레고피스 두 개가 부서져버렸다. 내가 이렇게 힘이 셌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건 분명 레고 측의 잘못이다. 이렇게 내구성이 안 좋다니. 여하튼 부서진 블록 때문에 일을 두 번 하게 생겼다. 하나하나 먼지를 털다 보니 분해하는데 총 5시간가량 걸렸다. 하고 나니 손가락이 저릴지경이었다. 이제 안전하게 친구에게 레고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주에 이렇게 두 가지의 일을 하고 나니, 막연했던 역이민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특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레고를 기억 속으로 정리하고 나니, 괜히 곧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역이민을 확정하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이미 행동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뭐 이러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토론토에 조금 더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언젠가 정리할 거라면, 불필요한 것, 옭매여있던 것들을 정리하면 좋으니까라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하고 있다.
마치 미국주식이 매일매일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우상향 하듯,
나도 불투명하고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역이민으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