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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놈의 디지털 Dec 26. 2016

내 안의 거짓 열정 판별법

그 일을 하고 싶으면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1.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글쓰기 관련 책을 사서 읽었다. 책장에는 벌써 글쓰기 관련 책이 6~7권 정도가 쌓였다. 글을 잘 쓸 수 있게 된 건 아니었지만 쌓인 책만 놓고 보자면 어찌 됐건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은 참 컸다. 글쓰기 관련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면 이제야 내가 글을 좀 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아마 정상적인 단계라면 그 다음은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비정상적인 단계를 밟아갔다. 책을 통해 얻은 자신감과 지적인 충만함을 아주 잠시 만끽한 후 글은 쓰지 않고 그 약빨이 떨어질 때 즈음 다른 글쓰기 관련 책을 사서 읽었다. 내 책장에 글쓰기 책이 7권이라는 건 이 비정상적인 순환을 그동안 7번이나 거쳤다는 말이다. 그만하면 됐다. 이쯤에서 나는 겨우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내가 글쓰기 관련 책을 읽는 이유는 정말 글을 잘 쓰고 싶어 읽는 게 아니라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약과도 같은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다고.


2.

진심으로 열망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마음을 참지 못하고 행동을 일으킨다. 소설가 김연수 씨가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가 되려면 소설을 쓰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듯이, 핑계를 대며 돌아가지 않고 정중앙으로 쭉 걸어나간다.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우선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같은 진리. 누구에게 질문할 필요조차 없고 더더군다나 누가 말린다고 해서 관두지도 않는다.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3.

참 지독히도 물었다. 글은 어떡해야 잘 쓸 수 있는 거냐고.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며 그 방법을 제대로 찾을 때까지 나는 내게 움직이지 말아야 할 면죄부를 주고 있었다. 아직 글을 바로 쓰지 않아도 될 핑계를 수 없이 만들어댔다. 글쓰기 책들을 만날 때마다 그 주위를 빙빙 둘러보면서 정작 글쓰기의 정중앙으로 단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정말 글을 잘 쓰고 싶어 했던 걸까? 글쓰기 책을 읽고 나서 바로 글을 쓰지 않았던 가장 큰 핑계거리는 막상 쓰려니 쓸 게 없어서였다. 글은 잘 쓰고 싶었지만 당장 쓸만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계속 유보했다. 흔히들 말하는 영감이 내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서없이 아무 글이나 막 쓰고 싶진 않았으니까.


4.

"머리가 얼마나 텅 비었건 재치가 얼마나 달리건, 그들에게 영감 따윈 허튼소리."
- 레이먼드 챈들러
영감이 떠오르든 말든 일단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5.

이것으로 내가 간직했던 마지막 방패는 보기 좋게도 산산이 박살 났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 영감을 기다리는 일 역시 내가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반증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속으로 무얼 하고 싶다는 그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내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하고 싶은 일들을 '지금' 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혹은 잘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질문만 하러 다녔고 준비만 하고 있었으며 그 일의 정중앙으로 몸을 던지는 것보다 주위를 빙빙 도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6.

비단 글쓰기뿐이었으랴. 취업을 준비할 때도 그 일을 하기 위한, 잘할 수 있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PR이라는 일을 하고 싶어 했던 나는 꼭 직장에서만이 아니라 당시의 준비 기간에도 PR이라는 업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 일을 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잘하기 위한 방법론은 그 일을 하면서 익혀도 될 일이었다.


7.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우선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같은 진리. 나라는 인간이 가진 열망과 열정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새삼 느꼈다. 더불어 앞으로 내 열망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기준점을 하나 얻었다.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가? 만약 당장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욕망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먼저 움직이고 해나가면서 그 안에서 내 욕망을 찾아보는 일이 남은 내 인생에서 더 긍정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도 아직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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