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이라도 진정 대책 없이 살아본 적이 있었는가
"너 참 대책 없구나"
뭐 이런 비슷한 말을 들으면서 나는 퇴사를 했다. 나를 한심한 듯이 쳐다봤던 부장님의 그 눈빛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대표님은 갑작스러운 퇴사를 결심한 내게 크게 실망해하며 "정말 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했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나를 나름 믿고 아껴주셨던(?) 대표님은 다른 직장을 구할 때까지 배려를 해 줄 테니 다시 고민해 보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대표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퇴사를 했다. 몇 달에 걸쳐 고민한 끝에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을수록 굳게 마음먹었던 나의 결심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흔히 자발적 퇴사를 하는 경우에는 크게 3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퇴사와 동시에 이직하기다. 지금 다니는 회사나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원하는 곳, 원하는 분야로 바로 옮겨 가는 경우다. 가장 올바른 케이스이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상태에서 동종 업계로 다시 이직하는 것을 염두하고 잠시 휴식 기간을 갖고자 퇴사하는 경우다. 이 경우만 돼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위의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앞으로의 원하는 방향과 계획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경우는 당장 나와서 무엇을 할지 정한 건 없지만 지금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일단 뛰쳐나오는 경우다. 그야말로 대책 없이 퇴사하는 케이스인데 나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이 방법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권하지도 않거니와 모두가 극구 말릴 것이 분명한 케이스다. 게다가 나는 어디 가서 경력을 인정받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세 번째 유형에서도 후에 가장 실패할 확률이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후에 써보고자 한다. 오늘은 내가 대책 없이 퇴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먼저 돌이켜보려 한다. 송별회 때, 친했던 몇몇 동료들이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어봤다.
"진짜 어디 안 알아봤어?" "나가면 대체 뭐하려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일단 그냥 나온 거야."라고.
퇴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바로 그 시기를 언제로 하는가였다. 이 고민 하나 때문에 내 결심이 입 밖으로 나올 때까지는 3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직에 대한 준비 없이 당장 그만둔다는 것이 그만큼 두렵고 무서웠다. 팀장에게 퇴사 관련해 미팅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엔터를 눌러야 하는 그 순간에는 이 엔터 하나에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이 덜덜 떨렸다. 손을 그렇게 떨어본 적은 재수해서 수능을 다시 봤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정말 겁이 났다. 이대로 나가면 앞이 깜깜해질 내 앞 날을 생각하니 그 불안감은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에게 외쳐댔다. 일단 일을 계속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라고. 준비기간을 가지고 퇴사를 하는 게 현명하다고.
퇴사를 말하기 위해 엔터를 눌렀던 그 순간에는 솔직히 머릿속이 정말 새하얀 상태였기에 마지막엔 무슨 생각으로 엔터를 누를 수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퇴사일이 결정되고 실제 회사를 나와보니 내가 그 순간 대책 없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이직을 위한 준비기간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또다시 막연한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았다.
퇴사를 고민하던 시절에 퇴사 관련해 다른 이들이 쓴 글들을 참 많이 읽었다. 입사를 했을 당시엔 그런 글들은 이상하리만큼 한 개도 보이지 않더니 퇴사라는 키워드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자 유독 퇴사 관련 글들이 많이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퇴사를 하는지 궁금했다. 참 씁쓸했지만 먼저 퇴사를 해 본 다른 직장인들이 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불안감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서 이대로라면 나는 결코 회사를 나올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대기업에서 당당히 나와 지금은 1인 기업가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대하는 삶의 태도에 있어 귀감이 되고 있는 어떤 분의 '퇴사를 하기 전 준비해야 할 3가지'관련 글을 읽었을 때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나는 그 3가지 중에 단 하나도 포함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히도(?) 그런 조언들보다는 이번엔 내 안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30년 인생을 살면서 이제 와서 가슴으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을 위해서' 삶을 살지 말자는 거였다. 짧게는 과거 10년 정도를 돌아보면, 나는 대학 입학을 위해 10대의 마지막 1~2년을 거기에 초점을 맞춰 살았고(물론 그렇다고 거기에 올인을 한 것도 아니었다), 군 제대 후엔 다시 재수를 하며 명문대 입학을 위해 1년을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이 목적지향병은 더 심해졌다. 거의 모든 일들이 취업이든 수상이든 무엇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줄 알았던, 그토록 원했던 '취업'이라는 것을 한 후에도 '~을 위해서'의 인생은 전혀 바뀌질 않았다. 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도 다음 이직을 위해 또다시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내 모습에서 그제야 '아차'했다. '아..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라고.
나는 그래서 대책 없이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이직 준비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퇴사를 했다. 이직을 위해서 또다시 준비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설사 일을 계속하면서 준비 기간을 동시에 가졌다면, 그래서 바로 이직을 할 수도 있었다 하더라도 그 시간마저 앞날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날지는 결코 모른다. 왠지 준비를 하면 내가 생각한 그런 일이 이뤄질 거라는 그 기대감 때문에 내 하루는 다시 미래에 발목 잡힌다. 나는 내가 30년 동안 해 온 이 짓거리(?)에 진절머리가 난 셈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세운 미래의 목표를 위해 현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태도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럴 자격도 없거니와 나 역시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나에겐 맞지 않았고,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시도해보려고 하는 것뿐이다.)
회사를 나온 지 3주가 흘렀다. 지금도 주변에서 묻는다. '요즘 뭐 준비하고 있냐'고. 이런 대답을 하면 또다시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 표정을 맞닥뜨려야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거 없다. 이직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일을 지금 내 24시간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정말 애쓰는 중이다. 웃긴 소리 같겠지만 이직을 위해 준비하는 일보다도 이게 더 어려운 것 같다. 틈만 나면 나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든 일들을 이직을 위한 준비 시간으로 만드려고 한다. 내 안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내 하루는 그렇게 다시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지금 충실히 살아가는 하루 그 자체가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은 보이지도 않는 앞날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자 수단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럴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산책을 하거나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하는 일들, 이 순간들을 목적으로 대해보자고 스스로 다잡고 또 다잡는다.
'뭐 준비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런 거 없다'라고 답하면 이어서 질문한다.
"그럼 요즘 뭐하는데?"
앞으로의 무언가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그냥 마음 가는 것을 찾아서 해보려고 한다. 더 이상 다른 목적을 두는 책 읽기를 그만두고 그 책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읽고 싶다. 나중에 취업하면 필력을 뽐내기 위해,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 내 모든 하루를 수단으로 삼았던 인생에서 이제는 하나하나씩 모든 일들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바꿔나가고 싶다. 그렇게 내 마음 가는 대로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점'들을 하나씩 찍어가고 싶다. 그렇게 찍은 점들이 정말 나중엔 연결되리라는 믿음은 굳게 갖되, 내가 찍는 그 점들을 다시는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는 만들지 않으려 한다. 후에 그것들이 나를 성공한 길로 안내하는 점들이 아니었을지라도 상관없다. 그 순간 정말 즐겁게 살았으면 됐다는 마음으로 살아보려 한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도 전혀 없다. 이것이 대책 없는 퇴사에 대한 비겁한 합리화라 할지라도 남은 인생에서 눈 한번 딱 감고 이렇게 살아보자.
+@
오늘 하루를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 이러한 태도에 관해 누구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건 마치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냥 '인생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막살겠다는 말 아니냐며. 이 말만은 꼭 남기고 싶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 하루를 목적으로 대하며 산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소중한 인생을 허투루 보내며 생각 없이 막사는 것은 아니라고. 남은 인생의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기 위해 누구보다 충실히 살고 있다고. 단지 그 목적이 이제는 뒤에 있지 않은 것뿐이다. 목표를 삼고 준비하며 달려가는 삶만이 정답은 아니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