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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09. 2020

마실 것의 일상 #4. 남이 내려준 커피

어쩌면 식사 이상의 시간.

준비물: 시간과 카드(현금), 나를 위해 커피를 내려준 어딘가의 누군가.



 50대셨을까? 짧게 나눈 대화였지만 기억에 오래 남은 말이 있다.


“저 정도 나이가 되면 가장 맛있는 밥이 뭔 줄 아세요?”


“글쎄요. 뭔데요?”


“남이 해준 밥이요. 남이 해주면 라면도 그렇게 맛있어요. 나가서 먹으면 더 맛있구요.”


‘남이 해준 밥이 맛있다.’ 그 말이 가끔 생각났다. 매일 뭘 먹일지 고민하고 시간에 맞추어 밥을 챙기는 일. 애써 차린 밥상에 앉아 투정 부리는 것을 달래기도 하고 밥공기를 들고 다니며 먹이기도 한다. 식사가 끝나면 쌓이는 설거짓거리도 밥을 챙기는 일이다.


 매일, 매일 빠짐 없이  가족들의 식사를 책임 세월 속에서 남이 해준 밥과 나가서 먹는 밥은 짧은 해방이자 즐거운 일탈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 일상의 고됨과 의미가 요즘 내게도 와 닿는다.


 식구(食口). 함께 먹는 사람이다. 깨어있는 시간 중 식사 시간은 꽤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매일 매일 빠지지 않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이다.


 함께 자는 사람, 함께 먹는 사람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다. 불편한 사람과 먹느니 홀로 먹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함께 먹는 이가 좋아하는 이일 때 그 시간이 더 좋은 것임을 말해서 무엇할까. 좋은 사람에 음식의 맛까지 좋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그것들을 내가 선택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일상의 어려움이다.  함께 먹는 사람을  항상 내가 선택할 수만은 없고, 식사를 어디서 할지에 대한 선택권도 내가 가질 수만은 없다.


 그런 불가항력적인 식탁을  자주 책임져야 한다면 그 고됨은 마음과 허리를 참 저릿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밥상을 차리신 분들을 뵐 때면 고개가 숙어진다. 그 일상에 감사한다.


 여하튼 나도 가끔 남이 내려준 커피가 즐겁다. 커피보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더 좋을 때가 많지만 그것 역시 커피를 마시는 일에 설탕처럼 녹아 있다. 날이 좋아서, 카페의 창가가 고팠다.


 자주 가는 혜화의 어느 골목에서 을지로 어딘가에서 보았던 카페와 비슷한 곳이 보였다. 커피도 공간도 좋았다. 아이스 필터 커피(에스프레소머신을 사용하지 않고 물을 부어 만드는 커피. 드립커피의 다른 이름)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햇볕이 좋았다.  사람의 온도 같은 필연의 온기가 와 닿았다.  그 온기가 지겹지 않도록 바람이 참으로 적절히 오갔다. 어쩌면 식사 후 차 한잔은 식사 이상의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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