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와야 한다

by 유하나
읽고 쓰려면
집을 나와야 한다.


집은..


남편에게는 확실히 쉼의 공간인 것 같고

아이에게도 충전의 공간인 것이 확실하나

나에게는 언제가부터

일터가 되었다.


엄마랑 살 때는 분명히 나도 충전의 공간이었는데 말이지.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빨래 내놓으면 엄마가 해줬다.


난 밖에서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니다가

집에서 잠만 잤다.


그런데 요즘은

집에만 있으면

마음이 무수리 모드가 되어

수많은 집안일이 자기를 봐달라며 아우성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아이는 10분에 한 번씩 나를 부른다.


외동이라 더 그런 것 같고

남편은 회사일로 많이 바쁘다.


어릴 때부터 영어공부할 때 빼고 미디어를 최대한 적게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아주 온갖 것을

애랑 둘이 같이하고 있다.


종이접기, 비행기 접기, 각종 보드게임은 말할 것도 없고,

탁구, 배드민턴...

내가 같이 한 것 중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던 것은 팽이 배틀이었다.


그리고 야구를 그렇게 하자고 하는데

하면 하겠지만

나도 좀 살아야겠어서

야구. 그건 절대 못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


몸 힘들고

시간은 많이 들어도

나름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라 여기고 있고

이것 또한 남자애가 초6 정도 되는 3-4년이면

끝날 것임을 알기에

나름 즐겁게 하고 있다.


어쨌든 나에게 집은
일터이다.



일터만 된 게 아니라

내가 100억이 있어도 계속할 일인


'읽고 쓰는 것'을 못하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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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족들이 다 있으면.


아니.. 없어도.

조금이라도 글자를 가만히 응시할 수가 없다.


집중이 안된다.


사방에 할 일이 널려있고 다음 할 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필사적으로 나와야만 한다.


읽고 쓰려면

.

지금 도서관에 와서 이 글을 쓰는 오전 10시 30분까지

내가 읽고 쓰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을 복기해 본다.


오전 8시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사람처럼

휘몰아쳐한 일은 다음과 같다.


1. 말씀 묵상과 기도


오랜 루틴이고

너무나 귀중한 습관이다.


2. 빨래 한판 하고 건조기 넣기


어제 남편은 골프를

애는 축구를 하고

교회 어와나에서 운동을 하고 와서

땀냄새가 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음.




3. 새벽 배송 식품 정리 후 미역국 끓이기


오늘 저녁으로 먹을 것이다.

오전에 점심. 간식. 저녁 식사까지 대충 휘몰아쳐 음식을 해놓지 않으면

하루 종일 찔끔찔끔하고 있어야 해서

읽고 쓸 수 없다.


읽고 쓰고 싶어서 했다.




4. 주말에 먹을 각종 과일 씻어놓기


이것도 한 번에 해놔야지

줄 때마다 씻고 있으면

하루 종일 하고 있다.


그러면 읽고 쓸 수 없다.


읽고 쓰고 싶어서 했다.



5. 아이와 남편 아침 주기

오늘 아침 준 것

1) 아이- 요구르트 범벅 사과. 소떡소떡. 토마토 주스

2) 남편 - 소식하겠다 하여 삶은 계란 1개. 모닝빵 1개 에프에 구워줌

(사실 남편은 손이 안 가는 분이다. 혼자 잘 챙겨 먹는다)



6. 부엌 정리하며 내 밥 먹기


꿀맛

명절 남은 음식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7. 똥팬티 2번 빨기(손빨래)


갑자기 아이가 팬티에 실수를 했다.

방귀를 뀌었는데 똥이 나왔다며;;;

엄마 와보라고 화장실에서 소리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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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다가 화장실 가서 똥팬티를 빨았다.


아이 아주 어릴 때는

밥먹다 똥 만지는건 일상이었는데

크고 나서는 오랜만이다.


애벌 빨래를 해서 세탁기에 넣었다.


근데 한 번 더 갈아입은 팬티에

또 똥이 묻었다.

또 한 번 팬티를 벗어놓았다.


또 한번 애벌빨래를 하고 빨래통에 넣었다.


그러면서

준이에게 엄청난 생색을 냈다.

'야... 어릴 때 생각난다.

너 세면대에 놓고 니 똥꼬 얼마나 씻어줬는데 내가~'

한바탕 난리 후


8. 나 나갈 준비, 애 나갈 준비. 가방 챙기기

ㅡ머리 빗고 세수하며 입으로 애 독촉 (멀티로 하는 게 4개쯤 되는 것 같다)

ㅡ9시 45분에 나가야 한다.

준이를 토요일 오전에 책 읽는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나 세상에 책 읽는 학원에 보내는 게

돈 젤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돈지랄 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일단 3개월 해보기로 저번달에 결정했다.


초저학년은 책 읽기가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온갖 스포츠를 하고 온갖 활동은 하는데

줄글을 정말로 안 읽어서.


도서관도 자주 데려가는데

요새 도서관은 줄글을 읽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학습만화를 치우지 않고는...



9. 아침 산책

남편은 일찍이 운동을 갔고

아이도 킥보드 타고 요 앞 학원에 갔다.


드디어!!!


집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일터에서 탈출한 느낌이다.

비가 그치고 공기가 너무 좋다.


산책을 10분 했다.


나뭇잎들이 막 샤워하고 나온 아이얼굴처럼 너무 예쁘다.




10. 드디어..

이 모든 것을 다 하고

비로소 도서관에 고요히 앉아있다.


드디어 이제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브런치에 방금 이 글을 하나 썼다.



이제 드디어

읽고 쓰고도 가족의 하루가 돌아가게 만들어놨다.


수년 전에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쓰기 루틴을 읽게 되었다.



엄청난 질투가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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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 몸만 하나만 건사하면 된다면

꼭 저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교만한 생각도 했다.


하루키는 누군가 밥을 차려줬고

누군가 빨래를 해줬을 것 같고

똥팬티를 빨아줘야만 하는 아이도 일상에 없었을 것 같고

사위 노릇도 쉽지않다지만

우리나라 K 장녀 K 며느리로서의

마음의 부담도 없었을 것 같았다.


팩트 체크 해본 건 하나도 없는데

마치 그럴 것만 같고


그렇게 믿고만 싶고


그래서

질투가 났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닌데도

엄마가 되고서는 남자 작가보다

여자 작가들

(특히 아이와 가정을 돌보면서 글을 계속 쓰는)에

엄청난 공감대를 느끼고 있다.


그 난리 북새통 속에서도 글을 계속해서 써내려가는 그 분을

그냥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지나

요즘 내린 결론은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은 없고

시간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글쓰기라는 건

일상에서 '우선순위를 세우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글을 꾸준히 써 나가고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쓸 수 있게

내가 훈련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렇게 밀도 있게 사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성경에 '만사에 때가 있다'라고 했고

그건 진리일 테니.


아들이 성인이 될때까지 딱 10년 남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또 며느리기도 해서 ~~

있다가 시댁과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2시간이 있다!


딱 2시간 동안 박사 논문 관련된 저널들을 읽으려고 한다.


고요하고

차분하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