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로 생각 펼치기
우리가 세운 왕, 우리가 만든 질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 신화를 다시 읽는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말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출현을 요청한 6 부족 조선 유민들의 말이다.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구한 존재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특별하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왕을 세우고 나라의 질서를 시작한 ‘민중’의 선택을 목격한다.
이윽고 이상한 기운이 퍼진 땅에서 하늘을 향해 울던 백마, 그 아래 놓인 자주색 알, 그 알에서 나온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그를 박혁거세라 불렀다. 이후 61년간 나라를 다스린 그는 승천하지 않았다. 죽은 후 시신은 땅에 흩어졌고, 한 곳에 묻으려 하자 큰 뱀이 이를 막았다. 결국 다섯 곳에 나눠 장사 지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오릉이다.
이 흩어진 시신의 서사는 단순한 전설일까? 아니면 신의 초월을 거부하고, 민중 곁에 남은 존재로서의 혁거세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상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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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과는 전혀 다른 시작과 끝
앞선 고구려의 동명왕이 하늘의 혈통과 신화적 힘을 가진 ‘영웅 왕’으로 등장했다면, 박혁거세는 공동체가 요청한 필요의 왕이었다.
동명왕은 혼자 강을 건너고 스스로 나라를 개척하지만, 박혁거세는 백성들이 모여 덕 있는 이를 찾으며 만들어낸 질서 속에 등장한다.
그래서 박혁거세의 신화는 고난을 뚫고 운명을 개척한 개인의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민중이 질서를 회복하고 왕을 ‘세운’ 이야기다.
죽어서 시신이 흩어지는 점 또한 영웅의 승천 서사와는 전혀 다르다.
동명왕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지만, 박혁거세는 땅에 흩어졌다.
이는 그의 권력이 초월적 존재에게 귀속되지 않고, 민중 속으로 다시 돌아간 것을 상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더 이상 위대한 존재로 남지 않고, 다섯 개의 능으로 나뉘어 공동체의 기억 속에 머무른다.
어쩌면 이 흩어진 시신의 서사는 **“신이 아닌 인간의 왕”, “영웅이 아닌 질서의 토대”**로서 박혁거세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영웅 신화와는 다른 결의 서사. 나는 이런 점들에서 혁거세 설화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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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영웅을 기다리는가
많은 스토리에서 우리는 주몽과 같은 영웅적 인물을 만난다. 신의 아들이고, 세상의 어지러움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치고 나라를 세우는 존재.
그런 서사 속에서 우리는 열광하고 감동한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가장 바라는 삶의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영웅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다르다. 누구도 완벽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고,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 내는 사람도 없다.
여기,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 왕이 있다. 고난을 이겨내어 영웅이 되는 개인이 아닌, 백성의 요청에 의해 태어난 왕. 그를 키우고, 왕으로 만들고, 세운 자들은 결국 우리와 같은 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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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선택은 오래 지속된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한 명의 영웅은 위대한 일을 해내지만, 2대를 넘기지 못하고 타락하거나 사라진다.
그러나 민중의 선택은 다르다.
민중은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질서를 세우고, 다음을 결정한다. 그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의 바탕을 만든다.
나는 확신한다.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혁거세를 스스로 왕으로 맞이하고 질서를 세운 조선의 유민들, 그 공동체의 힘에서 비롯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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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함께하는 힘이 있다.
우리에게 더 이상 ‘영웅’은 없다.
나도, 당신도, 혼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질서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은 혁거세와 신라가 그랬던 것처럼, 영웅보다 오래가고, 귀하며, 더 깊은 뿌리를 가질 것이다.
역사는 영웅에 의해 “잠깐” 새롭게 쓰일 수 있지만,
역사 그 자체인 우리는 결코 멈추지도 않으며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계속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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