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오브제] 돌의 여인

정읍사와 며느리바위, 기도가 만든 영웅의 형상

by 작가 박신

“돌의 여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고대 비너스의 조각상이 스쳐갔다가
곧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리던 삶과 부귀를 끝내 놓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

그 장면은 의외로, 우리나라 전국에 분포된
장자못설화, 며느리바위 설화와 닮은 듯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한국의 산중턱에 뜬금없이 솟은 바위들은
대개 ‘며느리바위’라 불리며 비슷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 며느리바위의 서사

풍요롭던 마을에 시주하러 온 중을
어느 집도 맞아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들른 대감집에서도 쫓겨나지만
그 집 며느리만은 몰래 쌀과 음식을 챙겨준다.

중은 은밀히 말한다.
“이 마을은 곧 물에 잠길 것이니
아기만 데리고 산 위로 피하되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

며느리는 아이를 업고 산을 향해 달린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마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때 아래에서 시부모가 자신을 간절히 부른다.
그 부름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순간,
며느리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다.

서양의 돌의 여인이
“욕망을 버리지 못한 자의 처벌”이라면,

한국의 돌의 여인은
지나치게 착했고, 순했고, 효심 깊어서 굳어진 존재이다.

장흥 읍내의 며느리바위를 처음 보고 이 설화를 전해 들은 뒤
나는 그 억울함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욕심도 죄도 없이 굳어버린 존재.
그 마음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


■ 또 한 명의 돌의 여인, 정읍사

그러던 어느 날, 정읍에서 또 한 명의 돌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도하다 돌이 되었다 전해지는 여인의 노래, 정읍사와 함께.

교과서 속 ‘중세국어 암기용’이던 이 노래가
그날은 이상하게 하나의 오브제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읽어본 노랫말.

달하 노피곰 도다샤 / 머리곰 비취오시라

집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기도하는 여인의 마음에만 집중해 보면
이 노래는 기도가 어떻게 개인 → 공동체 → 민족의 안녕은 확장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노래였다.

(새로운 해석 참고: 백제가요 정읍사 논총 2, 조용호, 「정읍사의 발화맥락과 화자의 기원에 대하여」, 2024.)

정읍사가 조선 시대 전적에서 음사로 분류되어 성적인 이야기로만 왜곡 돼온 점은 정말 아쉽다.
내 생각엔 정읍사가 오랜 시간 백제 민들에게 불린 이유가 결코 음란해서였을 리 없다.


■ 기도의 지경이 넓어질 때

기도는 언제나 ‘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간절할수록 기도는 그 지경을 넓힌다.

남편의 무사함을 비는 마음은
그가 지나칠 모든 이들의 안전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 공동체 전체를 품게 된다.

정읍사는 바로 이 확장되는 기도의 힘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기도를 상징하는 오브제가
바로 돌의 여인이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힘이 있다.
간절할수록, 기도는 반드시 멀리 퍼져간다.


■ 돌의 여인 – 한국적 영웅의 원형

정읍사의 여인은
칼을 들고 전쟁에 나서는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오래전부터
절실한 사랑을 품고 기도하는 자에게
영웅성을 부여해 왔다.

정복이 아닌 보호로,
지배가 아닌 정성으로,
폭력이 아닌 기도로 세계를 지키는 영웅.
그것이 한국 문화가 가진 독특한 영웅상이다.

정읍사의 여인은

돌의 여인은
바로 그 원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며느리바위를 다시 읽다

이제 며느리바위도 다른 시선으로 읽힌다.

악한 공동체를 구원할 힘은 며느리에게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며느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을 행한 사람이 공동체를 구원할 힘을 가진다.
그러나 아무도 그 며느리를 닮으려 하지 않았다.

며느리바위는 억울함의 상징만이 아니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며 며느리가 지녔던 구원의 힘을 이야기하던 것이다.

■ 돌로 남은 마음

우리 한국 문학 속의 여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남편을 지키며 세상을 지켜왔다.

그 마음이 쌓이고 쌓여 돌이 된다.

돌의 여인은 기도를 통해 세계를 지켜낸 아주 오래된 한국적 영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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