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묵상일기

오늘도 휴화산 되어 살기를

여호수아 24:1~13

by 디모츄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성실하게 섬기십시오. 여러분은 조상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 섬겨야 합니다." (수24:14/현대인)


본서의 마지막 장은 민족을 향한 여호수아의 유언으로 마무리된다. 24장 2~13절은 이 민족의 시초인 아브라함부터 지금(여호수아 시대)까지 하나님이 이 민족과 함께 하시고 대신 싸워주시고 구해 주셨던 역사를 간추린 대언(代言)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여호수아가 듣고 대신 전달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직접 자신이 행한 긴 시간의 구원과 사랑의 경륜에 대해 읊고 계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일개 부족공동체에서 하나의 민족이 된 것은 총리 요셉 이후 이집트에서 400년을 보내면서다. 여호수아가 93세에 지도자가 되고 110세에 죽었다 하니 이집트 400년 + 광야 80년 + 여호수아 체제 17년 = 민족형성 후 500년 남짓한 시간이 된다. 짧지 않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얼마나 아우성을 치고 배신을 하고 원망을 했는지는 성경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왕조실록이 그렇게나 객관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구약성경 역시 창세기등 신화적 영역을 제외하면 그에 못지 않게 신랄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등 뒤로는 작은 우상과 드라빔, 갖가지 신들의 형상을 은밀히 모신 채 이스라엘민족으로서의 수혜를 입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그들을 향해 지난 500년간의 역사를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솔직히 그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설령 지금 무슨 음성이 천둥처럼 들려와 하나님의 심정이 이러했노라 할지라도 나는 의심부터 할 테다. 그런 식으로 호도하는 이단과 사이비, 사이비 판정을 받지 않은 교회 내부의 요상한 종자들이 하도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를 향한 말씀과 같다는 것만은 알겠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 역시 이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묵상의 시간 뒤에 숨은 나의 수많은 죄들, 어두운 마음들과 어두운 시간들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장막에 숨긴 우상들을 못 보셨을까? 아니다. 24장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거듭 밝힌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주님을 택하고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한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당신들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버리고, 마음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수24:22~23/현대인)


나 역시 이 백성처럼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함께 하셨던 일들이 수없이 많다. 기적적인 도움도 많았고 설명하기 힘든 일들도 겪었다. 그러나 그 신비한 세월동안,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신실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 역시 본문의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이 행하였다. 어제까지도 그러했다. 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시고 나를 참고 기다리시는가. 나는 나아질 기미가 없어보이는데.


내가 나아지리라는, 번듯하게 되리라는 기대는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바울조차도 육신을 벗어던지는 날을 고대했다. 다른 사도들도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올바로 살아가라고 했지만 그렇게 된 성 싶지는 않아보인다. 죽기 싫어서 로마 반대편으로 갔다던 쿼바디스 도미네 - 베드로의 일화만 보아도,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불혹을 이루고 지천명을 영위하는 삶은 아니다. 즉 단계적 성화(Sanctification)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시 하나님이 이끌어주시고 질문하시고 대답해 주셔야 사는 삶이다. 나는 이것을 '견인적 성화의 지속가능' 정도로 부르고 싶다.


전도서에 따르자면 안개나 입김같은 것.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다. 동감동의한다. 하나님은 내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 아닐까. 다만 나와 함께 끝까지 하시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눈 한번 감았다 뜨니 사라질 인생, 그 안에서 여전히 같은 마음과 모습으로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실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온유하신 전언 속에서, 나 역시 그런 사랑과 인내를 받고 있다는 감사함과 안도감이 스며든다. 내가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오늘 내가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잘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안되지만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다보면 어느 상태를 지속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요새는 담배를 끊은지 수십년이 되었어도 병원에 가면 '담배를 안 피신 지 00년이 되었다'고 하지 '끊으신지 00년'이라고 하지 않는단다. 끊었다는 개념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담배라는 것이 끊어지는 게 아니란다. 마치 휴화산 같다. 사()화산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죄와 멀어진 휴화산같은 내 신앙은 어느새 활화산이 되고 만다.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인간의 신앙, 그 한계다. 점진적 성화? 누가 그것을 이루었는가. 나는 그런 사람을 어느 글에서도 본 적이 없다.


기력이 떨어져 죄 지을 힘이 없어지고, 예전보다 많은 죄를 짓지 못하고, 자기 한계를 체감하여 오히려 걱정과 근심이 줄어드는 것은 보았다. 여러번 도움을 받다보니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하며 마음을 다잡는 사람은 보았다. 그게 성화라면 성화겠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책에서 보았던 제법 웅장한 단계의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우선 성화라는 것은 '뒤로 가는 계단'이 없지 않은가. 50세 넘어 밧세바와 간음하고 자기 부하이자 남편을 살해한 다윗은 성화의 이론에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책들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성경에서도 아무도 못한 거를 어떻게 뭘 근거해서 할 수 있다고 하는 건지.


우리 모두 사화산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인생은 입김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여전히 휴화산 아니, 활화산이다. 이 시간 말씀 앞에 나와 생각을 정리하며 한가지 소망한다.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죄에 대해서는 휴화산이고, 의에 대해서는 샘물이 되어 보내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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