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1~17
'씨뿌리는 비유'는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와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앗들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떨어졌다. 길가의 씨앗은 새가 쪼아먹었고, 돌밭의 씨앗들은 뿌리를 못 내려 말라 죽었고, 가시덤불의 씨앗은 덤불에 막혀 자라지 못했다. 좋은 땅에 내린 씨앗만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사람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한다고 교회에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하나님 말씀이 잘 자라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내 마음을 옥토로 먼저 좀 만들어 주고나서 씨를 뿌리셔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식의 해석대로라면 돌밭이 돌밭으로 태어난 걸 우짜란 말이고.
성경에서 비유법으로 설교한 사람은 예수님이 거의 유일하다. 그 외의 제자들은 대개 직설화법을 사용하였다. 구약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비유법을 쓰신다. 음란한 여인 고멜과 혼인한 호세아는 결혼생활 유지라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명 받았고, 예레미야는 여러가지 특이한 행동들을 명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님의 직접 비유설교와 하나님의 대언적 비유메시지엔 공통점이 있다. 듣는 이들이 알아들을만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즉각적인 설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다. 17절 이하에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적혀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인 비유 메시지와 신약의 예수님이 보인 비유 메시지의 차이점도 있다. 구약의 비유 메시지는 백성이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선지자에게 더럽게 녹슨 쇠솥에 국을 끓이라고 시킨 뒤, 백성들이 궁금해 하자 이 녹슨 쇠솥이 너희들의 실체라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어찌 좋은 것을 부으셔도 어찌 아름다운 것이 나오겠냐며 회개를 촉구하는 식이다. 매우 직설적이고 해석도 바로 전달된다.
반면 예수의 비유 설교는 말씀의 선포 외에 구약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실현하는 역할도 병행한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3장 13~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겨 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해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마13:13~15/우리말)
예수께서 인용한 이 구절은 이사야 6장 9~10절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다. 패악하고 반역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깨달아지지 못하도록 그들을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다. 마음이 완악해져 목이 곧고 귀가 닫혀버린 이들에게, 귀가 열려있고 마음이 순종할 생각으로 부드러운 사람들이나 이해할 법한 비유들로 말씀을 전달해 버리는 것이다. 우매한 자들은 돌려까도 그게 자기 이야기인줄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당시 예수의 비유풀이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우선적으로 허락되었다. 바로 제자들이다(마13:10~11).
어떤 사이비는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올바르게 풀이된 말씀을 들으려면 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영적 존재(교주)가 있는 자기네 모임에서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현존하는 성경에 보면 비유와 풀이가 다 기록되어 있쥬? 그것도 2천년이나 됐쥬? 도서관 창고개방, 오답노트 공개, 정답 문제풀이집 배포된지 오래됐다 이 말이다. 무슬림처럼 새로운 신탁을 받아 경전을 새로이 만들었다면야 모를까, 신약 27권의 동일한 성경을 똑같이 사용하면서 '우리만 니들이 모르는 정답을 따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엔 이미 정답과 해석이 그 성경에 모두 적혀있단 이야기다. 그런데 뭘 새롭게 풀어?
그럼에도 성경책을 펴놓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다. 나는 중학교 때 수학 교과서를 읽을 때마다 그런 아득한 느낌을 느꼈는데, 수학에 관한 한 내 머리는 돌 정도가 아니라 바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수학강사 정**같은 분이 내 과외선생이 아니어도 내가 초등수학부터 다시 문제를 풀어나간다면 나도 수학을 다시 배워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실행하지 않을 뿐이다. 왜냐, 지금의 나는 수학이 필요하지 않아서다.
오늘 본문의 돌밭, 길가, 가시밭. 예수님의 해석은 이렇다(마13:18~23). 사이비 교주들의 해석과는 비할 바 없는, 정통적이고 이견이 없을 오직 하나의 해석. 예수님 본인의 풀이가 이미 존재한다.
길가에 뿌린 씨앗은 새가 쪼아먹듯, 악한 존재가 말씀을 채가는 경우가 있다. 흙이 별로 없는 돌밭처럼 고난과 핍박이 이어지면 말씀이 시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세상 걱정이나 유혹거리 때문에 신앙이 성장을 못하는 경우는 가시덤불밭의 씨앗으로 비유된다. 묵상하며 발견하는 나의 2차적 해석은 아래와 같다.
세 가지 안 좋은 밭 중에 길바닥은 아주 나쁜 땅에 속한다. 새가 와서 쪼아먹는다고 하지만 이미 뿌리가 내릴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이미 단단해진 땅에 씨앗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나?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 간다는 '악한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 땅은 최악의 땅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언의 백성들, 그들의 마음이 실은 여기와 가장 흡사하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마13:15) 이런 길가에 씨앗을 오래 방치해 봐야 뿌리 못 내린다.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한 마음(완악한 마음)에 말씀은 못 들어갈테고, 결국 눈 밝은 새가 와서 쪼아먹을 따름이다.
흙이 조금 있는 돌밭. 길가보다는 낫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에는 자원이 너무 없다. 돌이 많고 흙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돌밭을 예수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것을 못 버티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데 이걸 지키려니 힘들고 미움받고 손해보는 일이 일어나 '어 이거 안되겠다, 너무 손해가 크다'하고 관둬버리는 사람 정도로 읽힌다.
흙은 좀 있는데 이미 그 땅에 가시덤불이 창궐해서 싹이 본래의 나무 크기대로는 자라지 못하는 것이 세번째 땅이다. 예수께선 어린 잎이 나무가 되기까지 성장을 방해하는 가시덤불에 자란 씨앗을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랐는데 이걸 지키자니 힘들고 손해보는 일이 막심해서 장래까지 걱정될 지경이라 '어 이거 안되겠다, 이러단 내가 먼저 죽겠다'하고 관둬버리는 사람 정도로 읽힌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가 그 무엇보다 충만한 사람이 흙이 많은 옥토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은 팔 없이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앞 못 보고 태어나서 경쟁에서 시작부터 뒤처지는 어떤 불평등한 구조처럼 태어날 때부터 마음의 등급이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좋은 흙이 가득한 땅에 가까워진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세상 일을 걱정할수록 그의 마음은 가시덤불밭이 되어 갈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눈치를 더 많이 볼수록 돌밭이 되어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귀를 막고 세상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길가처럼 딱딱하고 굳은 완고한 땅이 되어갈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열매를 맺기까지 성장하는 길은 뭘까. 사랑이다. 사랑이 첫째가 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놀랍게도 세계선교가 아니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에서 전도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이 도는 2가지다. 하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야인 것, 또 하나는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죄사함을 대신 얻고 부활하여 새생명이 인간에게 도래한 것. 이렇게 주어진 새생명의 목적도 2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일상적 교제가 열렸으니 에녹처럼 늘 함께 동행하는 생명의 삶을 시작하라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너를 사랑한 걸 본받아 너도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생명의 삶을 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기독교가 가진 지상명령이다. 이런 목적을 가진 종교를 전하는 게 '전도'다. 그래서 전도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종교의 존폐는 선교나 전도활동이 활발히 이어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이 공동체 안에서 존속되고 흥왕하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본다. 이게 빠져있으면 우리가 전달할 알맹이가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세요. 왜? 예수님은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하시니까요. 너희들 보니까 별로 사랑이 없는 것 같은데? 이러면 게임 끝이다. 이런 종교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땅을 떠올리며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까? '결실'이라는 단어 앞에 물질적 풍요와 안정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면 기독교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믿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맺어야 할 결실은 사랑의 열매다. 사랑의 열매는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랑한 자체가 열매다.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시간들, 공간들, 기억들, 그것들이 그 자체로 열매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풍성한 기억의 소유자는 이미 풍성한 결실의 소유자, 이미 성공한 밭, 옥토인 셈이다.
학교에 있어보니 잘 안다. 제자가 성공하고 잘 나가게 되어 밥 한끼 얻어먹는 일이 흔치는 않다. 한 해에 배출된 학생들 중에 5년 안에 세상적 성공의 빛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될까. 15% 넘기 힘들지싶다. 물론 전공 직종에 종사하는 인원들은 많다. 그러나 전혀 다른 직업으로 전향하거나 여전히 진행형인 친구들도 여럿 있다. 만일 내 선생질이 성공했냐고 물을 때 제자의 전공지식을 통한 성공여부, 취업여부만 놓고 본다면 나 뿐 아니라 많은 선생들이 실패자일 것이다. 그런 시대다.
그러나 사랑으로 대하느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다. 사랑에 있어서만은 더 높은 확률로 성공하고 싶다. 나 자신이 좋은 밭이고 싶다. 교사로 부름받은 이후 계속되어온 나의 열망이자 소명이다.
주님,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거창하고 화려해 보이는 사랑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와 만나는 학생들이 모두 안전함을 느꼈으면 합니다. 그들에게 하는 말 한마디도 솔직하고 겸손하게 하겠습니다. 짐짓 속이거나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 않고 다만 제가 아는 바 최선을 다해 인도하겠습니다. 아는 것은 잘 가르치고, 모르는 것은 배워가면서 가르치겠습니다. 설령 그들이 당장의 성과에는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학교에서 저 때문에 혹은 제가 보인 태도 때문에 절망하거나 쓸데없는 상처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부족할 게 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뜨거운 마음을 부어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