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묵상일기

너나 나나, 뭣이 중헌디

마태복음 5:38~48

by 디모츄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마5:41)


한글성경이 '리' 단위로 번역했던 원문은 '밀리온'이란 단위를 쓴다. 당시 로마의 거리단위라는데, 1밀리온이 약 1.5km 쯤 된다고 하니 5밀리온이면 7.5km 정도 된다. 하지만 헬라성경 원문엔 1밀리온이라 되어있다. 5리라고 번역한 것은 한국의 1리가 360걸음 정도라고 한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5리쯤 되어야 1밀리온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각론하고, 현대식으로 바꾸자면 이렇게 되겠다. "너를 억지로 1.5km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3km를 동행하고"


예전엔 이런 사소한 지식을 알려고 하면 신학교에 입학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이런 지식이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었고, 성경에 대한 수학을 시작해야만 들을 수 있었던 고급정보에 속했었다. 이런 사소한 단위부터 히브리식 문장구조, 모음도 없는 히브리 글자들의 단어의 뜻 같은 것들이 하나하나 다 고급정보였던 시절이다. 이 시절 설교자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들이 아니면 내 신앙에 도움될 이런 고급정보들을 도무지 받을 수 없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신학서적들이 대중화되고, 급기야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이런 지식들은 고급정보가 아닌 게 됐다. 요즘엔 Ai가 일일이 검색하는 수고까지 덜어주니, 2000년대 초반처럼 '정보의 바다'에서 마우스 들고 뭘 캐올리는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구글에 '밀리온, 거리'라고 검색하니 위의 정보가 바로 뜬다. 기사를 찾아볼 필요조차 없게 됐다. 이 시대, 설교자의 위세? 적어도 정보전달자로서의 위세는 사라졌고, 계속 사라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저 5리가 진짜 한국식 5리냐 미국식 1mile이냐 로마의 1밀리온이냐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게 됐다. 그런 것은 설교자, 신앙인, 사역자의 덕목이 아니게 됐다는 것이다. 방금 말했듯이 그런 정보는 이미 넘쳐나고, 사람이 아니어도 인공지능이 잘 요약해서 설교문보다 더 보기 편하게 갖다 바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 비유는 당시 로마군인에게 허용된 임시 징집권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로마군이 무언가 수송할 일이 있으면,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거주민 누구에게라도 일을 대신 시킬 수 있었다. 길 가다가 "너, 너, 이거 들고 따라와." 해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산을 올랐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일화도 이런 법령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언제까지고 동행시킬 수는 없으니, 거리의 한계를 두었는데 그게 1.5km 다.


그러니 5리를 가라고 하면 10리를 가 주라는 말씀은, 징집으로 느닷없이 짐을 걸머지고 원치 않는 길을 걷게 된 식민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일제 강점기, 대낮에 일본군이 밭 갈던 조선인에게 이런 명령을 시켰다고 해 보자. 총칼이 무서우니 따르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기분이 더럽고 하기 싫을까. 그런 마음을 매일 느끼며 살던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 역시 인터넷 보면 다 나온다. 와. 좋은 세상이다 정말. 나는 이집트 선교사님께 처음 들었던 '컨텍스트적 고급정보'인데 지금은 인터넷에 그냥 나온다.



사역자들을 포함한 신앙인들에게 신학적 정보 보유자라는 타이틀을 빼면 뭐가 남을까. 5리가 사실 1밀리온입니다 여러분! 1밀리온 왜 가라는지 아세요? 그게 식민지의 명령이었어요! 이러면서 정보를 가지고 침을 튀겨봤자다. 마치 스머프 만화의 똘똘이 스머프처럼, 아무 것도 도움이 안되면서 마지막에 나타나 잘난 척 하다가 매번 엉덩이가 차이고 마는 우스운 캐릭터나 되고 말 것이다.


이제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 태도만 남았다. 삶의 일면이 예수를 닮지 않으면 말 그대로 주접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실 예수의 오늘 말씀은 대전제를 가진 비유 중 하나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맞서지 말라."(마5:38~39/우리말)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을 하신 후에, 세 가지 비유를 하시는데 그 중 하나가 5리를 가라하면 10리를 가주라는 말씀이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내밀라는 말씀과, 누가 고소를 해서 속옷을 뺏으려하면 겉옷도 내어주라는 두 개의 말씀도 함께 연결되어 있다(마5:38~42).


선량한 이웃의 무리한 부탁 정도가 아니라, 도무지 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는 부당한 압제와 폭력과 횡포를 삶에서 대하는 이들에게 당부하시는,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에 대한 내용이다. 정보 따위가 아니라 이것을 알고 지켜야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그렇다. 아니 실은 모든 시대에 그랬는데 유독 '지식'이 왕노릇을 했던 잠시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많이 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렇게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일상, 올 한해 나의 일터, 거기가 설령 식민지 치하처럼 느껴진다해도 예수의 말씀은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것이다. 나 괴롭히는 저 놈은 악마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나는 선해서가 아니다. 악을 만나도 선하게 살라는 당부다. 내 반대편에 선 사람을 악마화할 때, 그에게 선을 베풀어도 그것은 이미 선행이 아니다. 속으로는 악마라고 생각하면서 무슨 선을 베푸냐. 그건 다른 양태의 악일 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예수의 마지막 구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세리라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형제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방 사람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마5:44~48/우리말)


원수가 실은 원수가 아님을, 나를 핍박하는 이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원망을 듣는 한 사람일 뿐임을, 그리고 그런 나도 너도 동일하게 내려다 보시고 사랑을 가리지 않는 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아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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