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9-42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 아침에 아이에게 입바른 소리를 해 제 마음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사이가 조금 서먹해지더라도, 저를 향한 고운 눈빛이 잠시 거두어 지더라도 아이의 인생을 생각하면 양육의 시간이 남아있을 때 제가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한다고 되뇌입니다. 설령 저는 잠시 미움을 받더라도, 아이에게 좋은 습관이 생길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자녀된 저를 향하여 동일한 마음을 품어주소서. 제게 말씀하여 주시고 바른 길을 일러주소서.
묵상
성경은 세례요한이 베푼 물세례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했다(막1: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요1:29). 그리고 예수는 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했다(요1:33). 그러니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받기에 합당한 마음의 상태(자기 죄과를 인정하고 다시 바르게 살아보겠다는 마음)로 준비시키는 역할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죄를 없애주시는 일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고 다시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 된다.
이스라엘 초기부터 전해진 죄사함의 방법은 동물제사다. 흠없는 동물(주로 소나 양)을 가져와 그 동물이 주인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 대신(죄의 값으로) 희생동물을 죽여서 피는 뿌리고 사체는 불에 태운다(번제단). 여기서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아 소나 양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면 비둘기라도 잡아서 그 생명을 취하도록 했다. 죄를 피로서 대속해야 하는 것, 사실 죄를 지으면 죽음 외엔 기다릴 게 없다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타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인간에게 기회를 또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냥 심판을 내려 죽게 하면 되는데, 그러시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지간한 죄가 아니고선 즉각적인 사형언도의 법률도 없다.
그런데 그 어지간한 죄들이 죄목이 많기는 하다. 첫째로 우상숭배 및 신성모독, 주술적 행위 등 하나님을 직접모독하거나 반역하는 행위가 사형에 해당한다. 두번째로 고의적인 살인이나 인신매매, 유괴 등이 사형에 해당한다. 세번째로 부모를 때리거나 모욕하는 죄가 있고, 그 다음엔 여러 종류의 간음간통과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등 성적인 문제도 사형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울왕이 무녀를 통해 사무엘의 영(이라고 추정되는 존재)을 불러내었어도 즉각적으로 죽음에 임하지는 않았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을 동시에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죽음이 아닌 다른 징계가 내려졌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왔을 때도 그분은 그녀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셨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수없이 고백하고 수없이 배신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1500년 넘게 인내하시고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신 하나님이시다.
마지막 네번 째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신명기 17장 8절 이하에 나오는 죄다.
"만약 너희가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너희 법정에 올라오면 피 흘린 일이든지 소송이든지 구타한 일이든지 간에 그 사건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 장소로 가져오라. 레위 사람들인 제사장들과 그때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재판관에게로 가라.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판결을 내려 줄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 장소에서 그들이 너희에게 주는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하라. 또 너는 그들이 네게 알려 주는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법도와 그들이 너희에게 주는 결정대로 행동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한 말에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말라. 재판관이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섬기고 있는 제사장을 무시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에서 그런 악한 사람들을 제거하라."
이에 따르면, 제사장이자 재판관인 자의 판결대로 응하지 않는 것도 사형에 해당한다. 제사장이 판결하면 죄는 죄로서 정의된다. 이에 불복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한다.
현대의 일개 목회자는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질 자격과 권리가 없다. 성경은 그런 짐을 개별적인 목회자에게 지우지 않는다. 만일 그런 목회자가 있다면 그를 일컬어 제왕적 권력을 쥔 자라고 할 것이다. 다만 목회의 소명을 받은 이들은 '공동체의 영혼을 위해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께 아뢰야 할 사람들인 것처럼 깨어 있는' 이들이 되어야 하며, 공동체는 이렇게 인도하는 목회그룹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쓰여있다(히13:17). 마치 아름다운 가족과도 같은 모습을 이상향으로 제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히4:14이하). 또한 그는 세상을 심판할 권한과 능력을 가진 유일한 심판주이기도 하다(계19:11~16). 그러니 예수의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것은 죄'라고 알려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복된 일이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 뿐이리라.
그런데 그 음성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순간, 수신자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죄의 값은 죽음이기 때문에 성령이 죄를 죄라고 알려주시는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당면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외엔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되신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죽으신 예수님이신 까닭이다.
마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듯 하다. 지나간 너의 실수와 허물, 또한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여러 죄와 허물에 대한 걱정들은 모두 내게 맡기고 함께 한 걸음을 내딛자는 것만 같다. 너를 바르게 인도할 것도 나, 너의 죄를 사해주며 너를 고치고 가르칠 것도 나, 너를 끝까지 책임질 것도 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아, 이 말씀 하시려고 이렇게 멀리 돌아왔구나. 알아듣게 하시려고. 받아들이게 하시려고. 내 죄와 허물에 대한 지적과 책망으로 혼이 날 각오로 말씀을 상고해 나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훅 들어오시다니. 나도 이 사랑을 전하고 닮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용서하고 인내하며 소망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길로 성장하고 싶다. 그 길로 나아가고 싶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