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 : 43~51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을 매우 건조하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3개의 복음서를 보면 세례요한에게서 침례를 받고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신적 능력을 보일만한 사건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회당에서 권위있게 말씀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이나,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한 사건, 베드로의 고깃배에 올라서 설교를 마친 뒤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한 사건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요한복음에는 공생애 초기 제자 간택의 시기에 벌어진 그런 사건들이 전부 생략되고, 하나의 사건만 기록된다. 나다나엘이라는 제자를 부른 사건이다.
베드로 형제와 한 마을 사람이던 빌립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빌립은 나다나엘이란 사람을 찾아가 자기가 만난 메시야의 출현을 알린다(요1:44~45). 나다나엘은 예수의 출신지가 예언에서도 나오지 않는 매우 하찮은 곳임을 듣고 이를 의심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요1:46)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탄생하리라는 것은 오래된 예언서에 기록된 것이다(미가서5:2). 그러나 예수의 거의 전 생애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이루어졌다. 나 역시 본적지는 종로이고 출생은 신촌 세브란스에서 했지만 실제 삶을 영위한 곳은 서울의 다른 지역이었고 지금은 경기도에 내려와 오래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도 본적지는 종로이지만 태어나기는 강북에서 태어났고 유소년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종로구 한복판이 고향이라는 것을 주변사람들이 알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나다나엘의 이야기는 이치에 맞는 질문이다. 그 동네에 무슨 선한 약속과 예언이 있어서, 혹은 그런 징조가 있어서 나사렛 출신의 메시야가 나왔다는 말인가? 독일성서공회 해설집에는 '나사렛은 너무나 하찮은 곳이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도 초대 유대교 문헌들에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본문의 예수께선 나다나엘에게 '내가 사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언의 아이였다'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신적 권능을 살짝 보여준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참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이 없다.”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다.”(요1:47~48)
그가 시야에 보이기 전에 이미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보다 좀 시시하긴 하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랍비들도 놀랄만한 설교를 하는 사건들과 제자들이 엮여있지 않다. 왜 요한은 화려한 여러 증언들을 마다하고 이토록 담백하게 복음서를 기록하였을까. 다른 복음서에 들어간 내용과 중복을 피하려고 했나? 그런 의도까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요한복음에 예수의 이적과 기사가 안 쓰인 것도 아니다. 충분히 쓰여있다.
아무튼 나다나엘은 자신을 알아 본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했는지, 기도를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다나엘에게는 그 말씀이면 충분했다. 눈 앞에서 때 아닌 꽃이 피거나 병자가 낫지 않아도, 귀신들린 자가 온전해 지지 않아도 그 말씀이면 충분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적을 요구하며 불안에 떠는 신앙을 하는지 모른다. 예전에 뱀을 집는 세레모니를 하는 교회(라고 불러야 하나 이걸)가 뉴스화된 적이 있었다.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매주 강대상 앞에 뱀을 놓고서는 한명씩 나와서 뱀을 잡았다가 놓고 들어가는 의식을 하더라. 한번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매주 하더라. 하나님이 얼마나 못 미더우면. 안타깝다.
마음이 불안할수록 '당신 나 정말 사랑하냐'고 많이 물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를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의심은 확인을 요구하고 이벤트를 요구하고 그걸 통해 확신을 얻기 원한다. 결코 사랑을 이룰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비극이다. 그 비극이 연인 사이도 아니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비극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되는 참극이다.
'제게 한 말씀만 하소서!' 참 심플한 요구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수백수천마디의 전언을 기록해 놓았고, 그 전언은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신자 전체에게 해당된다고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한 어떤 한 말씀을 원한다. 그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소명을 바르게 알아 그 길에 순종하려는 준비된 자세의 고백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마음보다는 '나에게도 당신을 믿을 수 있게 특별이벤트를 해 달라'는 요청일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비관적인 짐작을 해 본다(주변과 교회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런 사람이 많으리라고 밖에 예상이 안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예수께서 부르실 때 그것이 어떤 말씀이든지, 어떤 상황에서 주어지는 메세지든지, 그것이 예수의 전언이라고 확인만 된다면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예수의 전언이라면 그것을 따르겠다. 어쩌면 여전히, 나는 내게 주셨던 그 전언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버지의 뜻이자 전언이며, 개인적으로는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것이다. 아이들을 향한 불 붙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 불은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나의 상태와 마음에 관계없이 꺼진 적이 없다. 그것은 아주 세미하고도 분명한 음성 세 문장에 불과했으나,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 안에 타오르는 불이다.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고 다른 불 옆에 있어도 빛을 잃지 않는. 내 영혼을 밝히는 불이다.
첫번 째는 이러했다.
"내가 네 기도처럼, 내가 마치 너를 아꼈듯이 아끼는 아이들을 보내줄텐데, 너는 몇 명이나 감당해 줄 수 있겠니?"
기독교 대안학교를 준비하면서 예비모임 기도회에서 들은 첫 음성이었다. 당시 놀고 있는 큰 학교건물을 1명당 1/N 임대료를 받고 대여해 준다는 이가 있어서, 건물 운영비용을 역산해서 학생 수를 결정하고 200명의 학생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자던 때였다. 그때도 은근 말도 안되는 기도제목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교사기도회는 해야되니 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들린 음성이었다. 혼자 바닥에서 울며 데굴데굴 굴렀다. 면구하고 죄송하고 창피스러웠다. 한명? 혹은 한명 반? 그 이상은 자신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아끼신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면 한낱 인간인 내가 몇명이나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도회 말미에 겪은 바를 나누었지만 큰 공감은 없었다.
두번 째는 이러했다.
"내가 (네게 맡기고자 하는) 그 아이를 보여주겠다."
2주 후인가 같은 기도회에서 들은 두번째 음성이자 환상이었다. 인생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최후인 환상이다. 눈 감고 기도하는 때 저 음성이 먼저 들린 후, 어떤 아이가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어슴프레 하더니 점점 명확하게 보였다. 혈색이 좋지 않은 노리끼리하고 비쩍마른 몸에, 이발한지 오래되어 부숭부숭해진 스포츠 머리를 한 중학생 하나가 맵시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았다. 바로 나였다. 이혼하고 재혼한 가정에서, 매일 아버지의 구타와 멸시 속에, 여러가지 위험과 슬픔 속에 노출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나. 내가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 내가 오는 거구나! 나에게 맡기실 아이란 바로 나로구나! 그날도 얼마나 충격 가운데 울었는지 모른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거북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세번 째는 이러했다.
"쟤가 너다."
6명의 아이들이 모집되어 가까스로 일산의 한 장소에서 학교가 시작되었다. 개교는 3일 뒤에 하고 아이들은 미리 소집해 오리엔테이션 겸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기숙학교 형태였던지라 개교 3일 전에 이미 학교가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다만 정규수업은 없었고 교회 수련회처럼 3일을 보냈다. 나도 주 2회, 수요일 저녁에 퇴근하여 목요일 오전에 출근하고,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여 월요일 오전에 출근하는 상주교사로(아이들도 금요일에는 집에 갔다) 보내는 첫날 밤이었다. 함께 하시는 여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남자 아이들 방에 신발이 하나 모자라는데, 이미 취침에 들어갔고 자기가 남자방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가서 확인을 해 달라고 한다.
첫날부터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들 방에 가보니 정말 한명이 없었다. 건물 전체를 뒤졌는데 1층 강당 한 구석에 앉아있는 삐딱한 한 아이를 발견했다. 뒤숭숭하여 잠도 오지 않고 하니 담배 한대 피우고 서성이다 갈 곳 없어 거기 앉았던 모양이었다. 여 선생님은 최대한 좋은 말로만 달래고 싶어했으나(첫날이니까) 나는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어 그러면 안된다고 어서 올라가라고 했다. 기분이 영 안 좋으셨는지 톡으로 뭐라고 하시더라. 뒤숭숭한 마음으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침에 일어났다. 아이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침 첫 시간은 채플 같은 거였는데, 기도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저 음성이 들렸다. "쟤가 너다." 놀라서 눈을 떴는데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쟤가, 쟤들이 나로구나. 이해가 됐다. 믿어졌다. 받아들여졌다. 불이 붙는 순간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그 아이를, 나를 꼭 안아주었다.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아이도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14살부터 19살까지 다양했지만, 그 6명의 아이들이 모두 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 내 마음에 켜진 불이 아직도 여전하다. 사람과 장소는 바뀌고 가르치는 모습도 바뀌었지만 언제나 여전히 내게 맡겨진 학생들을 향한 마음은 저 세번의 말씀 때문에 켜진 그대로다.
심지어 내가 깊은 심연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바르지 않게 살려고 발버둥을 칠 때도 이 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그런 내게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저 문장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애써 상상의 나래를 펴 억지추측하는 것은 아예 모르느니만 못하리라 생각이기에, 그냥 문장을 문장대로 놔두고자 한다. 다만 나의 예전을 떠올리게 하였으니, 그도 그 어떤 사연이 있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잠시 생각해 볼 뿐이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다"는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