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흔적

by 문객

만약 루머에게 연락이 오면, 그와 함께 어디로 여행을 가볼까? 어느 곳에 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루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갈까? 아니면, 짧은 순간이라도 답답함을 털어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산으로 갈까? 산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간에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누어지니 산은 일단 루머 하고 상의를 해봐야겠다. 그리고 다음의 목적지는 어디로 정할까? 사람들의 호흡을 느끼며 생의 풍경을 맛볼 수 있는 시장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시장에 가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어쩌면 루머가 그 풍경을 보고 지금의 자기 모습 속에서 나아갈 바를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디로 갈까?


루머를 만나기 전, 루머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학교로 간다. 분명 루머가 남긴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특히 사물함과 책상 속은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세계를 보관하거나 감추기 위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말이 없거나 내성적인 아이일수록 사물함 속에는 공개되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담은 기록과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루머의 사물함을 열자, 사물함 속에 찢어진 책과 유인물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다. 누군가엔 점수를 올리기 위한 그 중요한 유인물이 다른 누군가에겐 찢어진 종이가 된 채 어느 공간에 몰래 버려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해야만 하는 학생들에겐 그것은 소중한 것이지만 공부보다 다른 무언가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겐 그건 그저 또다른 종이일 뿐이다. 그러나 교사는 정성스럽게 작성한 유인물이 누군가의 책상 밑이나 바닥에서 의미없이 떨어져 찢겨갈 경우 분노하게 된다. 공부하라고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것을 그렇게 의미없이 버리는 행위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조금씩 더 무관심한 존재가 되거나 부정적 모습만을 각인시켜 가게 되는 것이다. 루머의 사물함 속을 보고 있으니, 교실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찢어진 유인물 밑으로 스프링 노트 한 권이 보인다.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읽기 힘든 필체로 여러 칸을 오가며 많은 글들이 쓰여져 있다.


- 위험한 것은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위험한 것은 내재되어 있는 아픔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험한 것을 다만 외형적인 것에만 의지한 채 파악하려고 한다.


- 오늘도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은 진보의 일각에서 칭찬의 일인지는 몰라도 화합의 측면에서는 갈등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따라가지 않고 잠을 잔다.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도덕적인 삶을 위한 길, 어쩌면 소크라테스도 진정으로 본인의 길을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너 자신을 알 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 떠나고 싶다. 어디든지 떠날 수만 있다면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 굳이 어떤 의무감에 통과의례 같은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처럼 버겁고 답답한 일도 없음을 알기에 떠나고 싶다.


- 상담을 했다. 내 성적으로는 4년제 대학 중 가장 밑에 있는 저 대학 정도 갈 수 있다고 한다. 대학 갈 생각조차 없는데, 대학을 가라고 한다. 대학을 가야지 사랍답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을 못 가면 평생 내 삶은 사람답지 않은 삶이 되는 것일까?


- 바람이고 싶다. 풀이고 싶다. 나무이고 싶다. 그리고 강물이고 싶다.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바람, 풀, 나무, 강물처럼 자유로운 존재도 없는 것 같다.


- 갑자기, 오늘, 엄마 생각이 났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존재감에 깊은 의미를 담고 싶지 않지만 갑자기, 오늘, 생일 아침, 엄마 생각이 나 엄마 사진을 오랜만에 열어봤다. 사진 속 엄마가 웃고 있다.


- 미워하고 싶지 않다. 미워하고 싶지 않다. 다 생각해 보면 불쌍하고 안쓰러운 것이 인간이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내 마음의 짐만 더욱더 깊어가는 시간, 정말 내 마음의 삭제 버튼이 있다면 이 모든 미움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 아버지, 아버지의 슬픔을 봤다.


- 내 얼굴엔 내 마음의 옹이처럼 점들이 많이 나 있다. 어쩔 땐 그 모든 점들을 칼로 다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싶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 떠나고 싶다. 어디로 갈까? 내가 떠나면 누군가는 슬퍼할까? 슬픔, 그런 감정의 물결에 깊은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존재의 사라짐에 조금이나마 흔적을 묻게 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감사할 일일 것이다.


루머는 정말 어떤 아이였을까? 그의 글속에 한참을 빠져 그가 남긴 흔적과 빈자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학교를 오가던 그의 눈빛을 생각해 본다. 적어도 이런 글을 쓸 정도라면 그는 분명 단순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분명 다른 어떤 고민과 생각 때문에 가출을 했을 것이다. 그의 내면의 이야기가 더욱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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