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한 줄 그가 적은 글들을 다시 읽어 본다. 지금껏 루머는 스스로의 내면에 담긴 생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이처럼 표현한 적이 없다. 아이들도 루머의 내면세계를 잘알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루머는 그저 조용하게 반 어딘가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고 있는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남기곤 간 글 속에서 루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본인 나름대로 분명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아이로 보였다. 그가 말한 존재의 길에 대한 고민과 답답한 교실 속 풍경에 대한 고백은 어쩌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가장 진솔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루머가 앉아있던 책상으로 가 본다. 책상 위엔 날카로운 볼펜 같은 것으로 남긴 낙서가 얼룩져 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그려놓은 선의 방향은 일정하게 한 직선을 향하기도 하고, 어떤 한 지점에서는 그곳만이 집중적으로 파헤쳐져 있다. 그리고 중앙 한 곳에 아주 깊고도 선명하게 달팽이관 모양을 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달팽이관의 시작점을 따라 빙빙 그가 남긴 마지막 끝자리까지 따라가 본다. 곡선을 파헤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한 점 한 점의 흔적이 모여 작은 동선을 이루고 결국 처음에 시작했던 낙서가 마지막 끝자리까지 마음을 붙잡게 되었을 것이다. 선의 곳곳엔 끊어짐이 있다. 그리고 그 끊어짐의 앞과 뒤에는 깊음과 얕음이 반복되고 어느 부분에선 교차로의 헤맴처럼 십자가 모양의 일탈이 보인다.
루머의 의자에 앉아 본다. 의자가 바닥과 수평을 이루지 못한 채 삐걱거린다. 불편하다. 다시 엉덩이를 의자 끝까지 바짝 당긴 채 바르게 앉아본다. 여전히 수평이 맞지 않는다. 한쪽 어딘가가 짧은 거 같다. 잠시 의자를 앞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교실 칠판을 바라다본다. 그곳에 한 사람이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시선은 오직 앞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만 쳐다보고 있을 뿐 이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반드시 시험에 출제되니 중요한 표시를 하고 꼭 공부해야 해. 알았지? 선생님이 나온다는 것은 반드시 출제되는 거 알지? 너 거기, 왜 졸고 있어? 책에다 체크를 해 놓으라고. 그래서 어떻게 대학 갈 건데.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졸고 있을 때냐? 너 내신 몇 등급이야? 올리자고 했잖아. 할 수 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단 0.1등급이라도 올리면 희망이 보인다고. 노력하자고 했잖아. 설령 결과가 어떻게 다가올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보자고. 애들아, 대학 안 가면 우리나라에선 결혼도 못해. 고졸을 누가 만나려고 하겠어. 무조건 대학은 간 다음에 그다음에 미래를 생각해. 그게 살 길이야. 선생님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가 그런 학벌을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해.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말이 멈추고 체념의 시선이 한동안 지속된다. 그의 눈빛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다. 책상이 보인다. 책상 위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진다. 옆에 놓인 볼펜을 붙잡고 그 끝머리로 사선을 하나 그려본다. 불안함이 조금 사라진다. 더 깊게 사선과 사선 사이에 흔적을 남겨 본다. 잠시의 공백에 가슴이 뛴다. 손에 더욱더 힘이 가 볼펜을 굳게 잡고 책상에 동그라미를 그려본다. 하나, 둘, 그가 다시 수업을 진행한다. 다행이다. 잠시, 흔들거리는 의자를 타고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외롭다. 더 깊게 파본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루머의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어 본다. 날카로운 나무의 톱니 같은 조각들이 손가락 끝에 느껴진다. 더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어 본다. 종이 같은 물체들이 잡힌다. 찢어진 성적표와 각종 유인물들이 답답하다는 듯 손가락 안에 살포시 안긴 채 밖으로 나온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정렬해 본다. 유인물 한 장에 그림 하나가 보인다. 뱀 그림이다. 여러 마리의 뱀들이 뒤죽박죽 꼬여서 요동치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 뱀 밑에 한 사람이 보인다. 뱀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빨간색 점 두 개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유인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보인다. 새의 그림이다. 그런데 날개가 없다. 날지 못하는 새가 바닥에 배를 허공에 드리운 채 빨간색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교실에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바람이 분다. 여름 바람치고는 제법 선선하게 다가온다. 바람이 교실안에 머물다 떠나지 못한다. 가끔식 블라인드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칠판 아래 쌓인 분필가루가 바람에 날린다. 그리고 루머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유인물들이 바람에 쫓기어 바닥으로 향한다. 루머는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