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에게 전화를 걸까? 아니 전화를 걸면 당황스러워 받지 않을 것이다. 문자를 보내자. 일단 부여에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기다려보자.
'루머야, 선생님이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니? 선생님, 지금 부여인데.....'
신동엽 시인의 시비 앞에 앉아 루머의 답신을 기다려본다. 그가 쉽게 연락을 전해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한 번 즈음은 그를 만나서 교사와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노을빛이 깊어가는 강물 위로 땅거미가 진다. 바람도 제법 선선해지고 강변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소리도 멀어져 간다. 고요함과 적적함이 백마강의 주변을 감싸 안는다.
루머의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되나? 아니면, 오늘 하루 정도는 숙소에 머물며 그의 연락을 기다려야 되나? 루머가 부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본인의 안부가 궁금해 선생님이 여기까지 온 것을 루머가 알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구두레 조각공원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걷던 방향과 또 다른 백마강의 풍경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루머가 학교에서 보여줬던 행동과 그가 남긴 글과 흔적 사이에는 꽤 깊은 괴리가 있었다. 그가 보여준 외형적 모습은 말없고 스스로를 잘 표현하지 못하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그가 남기고 간 메모와 기록 속에서 만나본 루머는 다른 누구보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였다. 이러한 괴리감을 단순하게 내면적 성향과 외향적 표현 간의 불일치로 이해하자니, 그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과 그가 보여준 행동이 너무 궁금했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아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그 무언가에 의해 괴리된 본인의 모습으로 인해 애써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행동은 드러나는 것에 쉽게 길들여져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평가는 모두가 다 각자만의 주관적 생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평가에 의해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루머는 어쩌면 이런 평가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내면을 찾고 자신만의 대화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아는 스스로의 자아가 굳게 자리 잡힌 루머는 그런 모습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루머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그리고 오늘 밤은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적어도 한 존재의 행방을 찾는 발걸음이라면 그 정도의 인내와 기다림은 필요할 것이다. 구두레 조각공원 인근 숙소에 여정을 푼다. 밤이 깊어간다.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과 맥주 몇 캔으로 허기와 외로움을 달래 본다. 언제부터인지, 술이 주는 잔잔한 감성의 울림에 자주 끌리곤 했다. 그때마다 조금씩 마시던 술이, 조금씩 벗이 되어간다.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단순하게 나쁜 행동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도 않다. 술로 인해 적어도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딱딱한 감성을 조율해주는 술 앞에 굳이 부정적 메시지를 던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잔 두 잔이 지속될수록 몸이 따라와 주지 않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행의 의미는 열심히 무언가를 찾기 위한 분주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머무름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게 된다. 굳이 많은 것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어느 낯선 곳에 홀로 처해 있을 때 그곳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생각과 사연들을 전해준다.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은 더없이 많은 생각과 깨달음을 선물해 준다. 두 평 남짓한 공간 속에서 온전하게 나를 되돌아보며 창문 밖으로 깊어가는 어둠을 벗 삼아 김광석의 '혼자 남은 밤'의 노래를 들어본다.
어둠이 짙은 저녁 하늘
별빛 내 창에 부서지고
외로운 밤을 홀로 지샌 내 모습
하얀 별 나를 비춰주네
불빛 하나 둘 꺼져갈 때
조용히 들리는 소리
가만히 나에게서 멀어져 가면
눈물 그 위로 멀어지네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
되올 수 없는 시간들
빛바랜 사진속에 내 모습은
더욱 더 쓸쓸하게 보이네
아 이렇게 슬퍼질 땐
거리를 거닐자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루머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 밤이 깊어간다. 루머도 김광석의 혼자 남은 밤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김광석의 음악에 대해 그 정도로 평가를 하고 있을 정도라면 분명 이 노래를 알고 있을 것이다. 혼자 있거나, 이별을 겪었거나, 여행을 하고 있거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갔을 때 김광석의 음악을 들으면 가장 친근한 벗이 되어 '괜찮아, 괜찮아'라며 힘을 내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 준다. 아마도 이 점은 김광석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