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조하기 이를 데 없다. 가장 사소한 동작일지라도 내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만 같다.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알아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선택해야 한다. - 사르트르의 구토 중 일부.
사르트르를 읽으며 내 운명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으니 늘 운명 앞에 무릎 꿇지 말자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다. 특히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벽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때면 사르트르를 읽곤 했다. 그런데 그 사르트르를 지금 루머와 머루가 읽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르트르를 통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배우며 깨닫고 있는 것일까?
"루머야, 사르트르 좋아해?"
"네, 머루랑도 인터넷 문학모임에서 사르트르 이야기하면서 만났어요."
"아, 그렇구나"
그것도 모르고 학기초 상담하면서 친구관계를 묻는 질문에 인터넷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다는 답변에 되도록 학교 안에서 친구를 사귀도록 노력해 보라고 했으니 루머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루머에게는 어쩌면 그의 정신세계를 함께 공유할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루머는 사르트르 어떤 면이 좋아?"
"결국 삶은 스스로의 문제고 그 누구도 내 삶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그 가르침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다른 사상들은 죄다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길을 따라 살아가라고만 말하는데, 사르트르는 그저 존재 그 자체의 위태로움을 지적하면서 구토를 느낄 수밖에 없는 실존의 문제를 당당하게 짊어지고 가도록 해서 좋은 거 같아요."
"맞아요, 사르트르는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을 통해서 본인이 처한 실존의 위태로움을 보여주고 싶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 실존의 위태로움은 우리 모두의 위태로움일 거예요. 그리고 믿고 사랑하는 여인 안니의 이별 선고에서 사르트르는 관계란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고 그 누구나가 가장 소중한 존재로부터 깊은 슬픔과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경종을 울려요."
루머와 머루의 문학에 대한 이해력과 표현력은 이미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수준에 있었다. 고등학생이지만, 그들은 이미 대학생만큼 많은 책을 읽고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들으며 나도 모르게 잠시 그들의 두 눈빛 속에 빠져 들어간다.
"애들아, 샘님이랑 밥은 어떻게 할래?"
그녀의 목소리이다. 반 즈음 밖의 공간을 보여주는 창밖을 보니 벌써 저녁때가 된 듯하다. 불을 킨다. 머루의 한쪽 눈이 더욱더 선명하게 보인다.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찡그린다. 다시 불을 끄고, 책상 위에 주황빛 스탠드 불을 킨다.
"괜찮아요. 불을 켜도."
"아니, 선생님도 너무 눈이 부셔서."
학교에서 봤던 루머와 지금 내 앞에 있는 루머는 다른 사람 같다. 아니, 어쩌면 루머는 그대로인데, 학교에서 그와 만나는 시간 동안 이런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것이 루머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학교의 틀에만 갇혀 루머의 결석을 지적하고 그의 행동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시하고 훈육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는지도 모른다.
억압된 내면의 분노와 상처가 풀리기 시작하면 처음에 가장 먼저 눈빛이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사람의 시선을 온전하게 담을 수 있게 된다. 지금 루머는 학교에서와는 다르게 나의 시선을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바라보며 말하고 있다. 그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눈빛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뭔가 불안증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을 할 때도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다가 가끔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루머는 지금 내 눈빛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그가 좋아하는 사르트르를 누구보다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꾸 엇나가던 아이에게 따뜻하게 던진 한 마디의 칭찬이 다음 날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킨 경우가 있다. 포기하며 무시하다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 '누가 뭐라 해도 선생님은 널 믿고 싶어, 그리고 믿을래'라고 살며시 던진 한 마디가 다음 날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켰다. 어쩌면 이게 바로 관심과 교육의 힘일지 모른다. 공부 잘한다는 칭찬은 그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늘 그런 칭찬의 온상 속에서 성장하며 자라다 보니 그런 칭찬에 크게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학교라는 틀에 적응하지 못해 늘 교실 한 편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관심과 칭찬은 때때로 그 아이의 행동을 한 순간에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루머는 지금 머루를 통해서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드리웠던 참된 나를 찾고 그 안의 자기와 만나는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