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흔적

by 문객

메일을 열어본다. 루머의 메일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루머는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대뜸 만나자고 했으니, 루머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언제 한번 그의 입장에서 고민과 아픔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이제와 그를 찾으며 이야기를 하자는 것 자체가 거부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루머의 흔적을 좀 더 찾아보기 위해 학기 초 아이들이 제출했던 학생 기초자료 조사서를 펼쳐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기 초 자신의 모습을 담임선생님께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작성해서 제출했지만, 루머의 내용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인적사항 : 아버지 모름, 어머니는 집 나감.

경제적 지원 여부 : 모름

취미 : 김광석 음악 듣기.

교우 생활 : 부여의 벗


상담 과정에서도 루머는 가족 관련한 질문에는 일체 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은 수행평가 과제를 확인하던 날 알게 되었다. 본인의 진로와 연관하여 존경하는 인물을 적고 그 사람에게 본받을 점이 무엇이며 앞으로 본인의 진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어오라는 과제에서 루머는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적어냈다.


1) 존경하는 인물 : 김광석

2) 본받을 점 : 김광석의 음악 속에는 단순히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숨결이 있다. 그는 단순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가수다. 누구나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마음이 착해지고 순해진다.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게 되고, 분노하던 감정도 조용한 물줄기가 되어 흐른다. 김광석의 노래 속에는 사랑, 희망, 꿈, 우정, 슬픔, 공감, 동경 등 우리가 접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감정들이 다 들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김광석을 존경한다. 김광석은 그 누구보다 나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슬픔 속에 젖어있을 때는 그 슬픔의 친구가 되어주고, 외로워 빈 하늘을 쳐다보고 싶을 때는 별이 되어 나를 위로해 준다.

3) 진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 기타와 하모니카를 배우고 싶다. 가수는 아니어도 그의 노래를 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의 노래 속에 들어가 그의 영혼을 느끼며 그가 전하던 세상의 사연들을 따뜻하게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 당시 루머가 김광석을 좋아한다니 매우 반가웠다. 왜냐하면 김광석이라는 가수는 나에게도 매우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대학 원서를 접수하려고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가던 객실 안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접했다. 앞에 앉아있던 중년의 부부가 스포츠 신문을 펼쳐보며 김광석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문 정중앙엔 생전에 하모니카와 기타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 후, 대학에 들어가 라디오에 의지한 채 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김광석을 추모하는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노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스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루머가 김광석을 알고 있으며 나보다 더 깊게 그의 노래를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 어쩌면 그때 루머가 김광석이라는 가수에 대해 그렇게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작성해서 제출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수업을 하면서 종종 김광석의 음악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가 보여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고뇌와 아픔을 노래로 표현한 점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줬는데, 루머는 바로 그 점에 대해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 교우생활 : 부여의 벗

그는 누구일까? 상담을 하면서도 루머는 자주 부여에 사는 친구를 말하곤 했다. 인터넷상에서 알게 된 친구인데,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 답답한 마음도 많이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그저 인터넷상에서 만나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쩌면 부여에 사는 벗이 루머의 행방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당시에는 그냥 학교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이 친구를 통해서 나누는 정도로 이해하고 상담을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되도록 인터넷 공간이 아닌 학교안에서 마음 터놓을 친구를 찾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루머는 종종 그 친구를 만나러 부여에 가곤 했다.


그러면 혹시, 지금 그 친구를 만나러 부여에 간 것일까? 루머의 성격상 다른 낯선 곳에 무작정 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에게 가장 익숙한 누군가가 그리워 부여에 간 것은 아닐까?


루머의 메일을 확인해 본다. 역시나 오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루머를 찾기로 마음먹은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찾게 될 것이다. 일단 부여로 가보기로 계획을 세워본다. 부여에 가 루머에게 통화를 해, 지금 내가 부여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그를 향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게 되어 그의 행방을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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