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를 만나기 전, 루머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학교로 간다. 분명 루머가 남긴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특히 사물함과 책상 속 어딘가에 루머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말이 없거나 내성적인 아이일수록 사물함 속에는 공개되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담은 기록과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왜 진작 이러한 노력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담임으로서 루머의 존재에 대해 회피하고 싶은 본능이 있었을 것이다. 수레바퀴처럼 정신없이 많은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진이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급 안에 다른 커다란 일이라도 터지면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누군가는 교사는 그저 아이들 가르치는 일만 하면서 방학이라는 긴 휴가를 즐기는 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며 배부른 소리 한다고 가볍게 말을 던지기도 하지만 하루종일 다섯 시간 넘게 수업을 하고 상담을 하면서 많은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면 정말 녹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머의 가출 또한 어쩌면 그냥 무시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더 강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루머의 사물함을 열자, 사물함 속에 찢어진 책과 유인물이 어지럽게 흐드러져 있다. 누군가에겐 점수를 올리기 위한 그 중요한 유인물이 루머에겐 그저 몰래 버려야 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찢어진 유인물 밑으로 스프링 노트 한 권이 보인다. 표지는 낙서와 이해할 수 없는 그림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읽기 힘든 필체로 여러 칸을 오가며 많은 글들이 쓰여 있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읽어본다.
- 떠나고 싶다. 어디든지 떠날 수만 있다면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 굳이 답답한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 상담을 했다. 내 성적으로는 4년제 대학 중 가장 밑에 있는 저 대학 정도 갈 수 있다고 한다. 대학 갈 생각조차 없는데, 대학을 가라고 한다. 대학을 가야지 사랍답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을 못 가면 평생 내 삶은 사람답지 않은 삶이 되는 것일까?
- 갑자기 오늘 엄마 생각이 났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존재감에 깊은 의미를 담고 싶지는 않지만 갑자기 생일날인 오늘 아침, 엄마 생각이 나 엄마 사진을 오랜만에 열어봤다. 사진 속 엄마가 웃고 있다.
- 미워하고 싶지 않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내 마음의 짐만 더욱더 깊어가는 시간, 정말 내 마음의 삭제 버튼이 있다면 이 모든 미움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 아버지, 아버지의 슬픔을 봤다.
- 내 얼굴엔 내 마음의 옹이처럼 점들이 많이 나 있다. 어쩔 땐 그 모든 점들을 칼로 다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싶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 떠나고 싶다. 어디로 갈까? 내가 떠나면 누가 걱정할까? 슬픔, 그런 감정의 물결에 깊은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존재의 사라짐에 조금이나마 흔적을 묻게 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감사할 일이다.
루머는 정말 어떤 아이였을까? 그가 남긴 글 속에 한참을 빠져 그의 흔적과 빈자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학교를 오가던 눈빛을 생각해 본다. 적어도 이런 글을 쓸 정도라면 그는 분명 단순한 반항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고민 때문에 가출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내면의 이야기가 더욱더 궁금해진다.
지금껏 루머는 스스로의 내면에 담긴 생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이처럼 표현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도 루머의 내면세계를 잘 알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루머는 그저 조용하게 반 어딘가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고 있는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글을 보니 루머는 본인 나름대로 분명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아이로 보였다.
루머가 앉았던 책상으로 가본다. 책상 위엔 날카로운 볼펜 같은 것으로 남긴 낙서가 얼룩져 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그려놓은 선의 방향은 일정하게 한 직선을 향하기도 하고, 어떤 한 지점에서는 그곳만이 집중적으로 파헤쳐져 있다. 그리고 중앙 한 곳에 아주 깊고도 선명하게 달팽이관 모양을 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달팽이관의 시작점을 따라 빙빙 그가 남긴 마지막 끝자리까지 따라가 본다. 곡선을 파헤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한 점 한 점의 흔적이 모여 작은 동선을 이루고 결국 처음에 시작했던 낙서가 마지막 끝자리까지 마음을 붙잡게 되었을 것이다. 선의 곳곳엔 끊어짐이 있다. 그리고 그 끊어짐의 앞과 뒤에는 깊음과 얕음이 반복되고 어느 부분에선 교차로의 헤맴처럼 십자가가 보인다.
루머의 의자에 앉아 본다. 의자가 바닥과 수평을 이루지 못한 채 삐걱거린다. 불편하다. 다시 엉덩이를 의자 끝까지 바짝 당긴 채 바르게 앉아 본다. 여전히 수평이 맞지 않는다. 한쪽 어딘가가 짧은 거 같다. 잠시 의자를 앞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교실 칠판을 바라다본다. 그곳에 한 사람이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시선은 오직 앞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만 쳐다보고 있을 뿐 이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반드시 시험에 출제되니 중요한 표시를 하고 꼭 공부해야 해. 알았지? 선생님이 나온다는 것은 반드시 출제되는 거 알지? 너 거기, 왜 졸고 있어? 책에다 체크를 해 놓으라고. 그래서 어떻게 대학 갈 건데.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졸고 있을 때야? 너 내신 몇 등급이야? 올리자고 했잖아. 할 수 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단 0.1등급이라도 올리면 희망이 보인다고. 노력하자고 했잖아. 설령 결과가 어떻게 다가올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보자고. 애들아, 대학 안 가면 우리나라에선 결혼도 못해. 고졸을 누가 만나려고 하겠어. 무조건 대학은 간 다음에 그다음에 미래를 생각해. 그게 살 길이야. 선생님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가 그런 학벌을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해.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말이 멈추고 체념의 시선이 한동안 지속된다. 그의 눈빛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다. 책상이 보인다. 책상 위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 진다. 옆에 놓인 볼펜을 붙잡고 그 끝머리로 사선을 하나 그려본다. 불안함이 조금 사라진다. 더 깊게 사선과 사선 사이에 흔적을 남겨 본다. 잠시 공백이 흐르고 그의 눈빛이 허공에 맴돈다. 손에 더욱더 힘이 가 볼펜을 굳게 잡고 책상에 동그라미를 그려본다. 하나, 둘, 그가 다시 수업을 진행한다. 다행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루머의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어 본다. 날카로운 나무의 톱니 같은 조각들이 손가락 끝에 느껴진다. 더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어 보자 종이 같은 물체들이 잡힌다. 찢어진 성적표와 각종 유인물들이 답답하다는 듯 손가락 안에 살포시 안긴 채 밖으로 나온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정렬해 본다. 유인물 한 장에 그림 하나가 보인다. 뱀 그림이다. 여러 마리의 뱀들이 뒤죽박죽 꼬여서 요동치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 뱀 밑에 한 사람이 보인다. 뱀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빨간색 점 두 개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유인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보인다. 새 그림이다. 그런데 날개가 없다. 날지 못하는 새가 바닥에 배를 허공에 드리운 채 빨간색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에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바람이 분다. 여름 바람치고는 제법 선선하게 다가온다. 바람이 교실 안에 머물다 빙빙 떠나지 못한 채 풍경을 남긴다. 가끔씩 블라인드가 흔들리고 칠판 아래 쌓인 분필가루가 날린다. 루머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유인물들이 바람에 날려 바닥으로 향한다. 루머는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