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들에게 대입 수시 지원에 접수할 대학을 조사해서 메일을 보내라고 발송한 적이 있다. 잠도 오지 않고, 아이들의 메일을 하나둘씩 열어서 자료를 만들어가던 중, 루머의 메일이 보였다.
선생님, 말없이 학교에 가지 않아 죄송합니다. 저는 대학에 갈 생각 없으니,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잘 지내세요.
짧은 메일이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루머가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틈을 내비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지금 분명 누구보다도 외롭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 것이다. 물론 그를 향한 몸짓이 어떤 실질적인 혜택을 주거나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을 듣거나 이해해 주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0년 넘게 고등학교 담임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말한 단어를 뽑는다면 그건 바로 성적과 대학이다.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결국 대학으로 시작해 대학으로 끝났다. 새장 같은 교실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의 눈빛과 혈기 또한 결국 성적의 서열에 따라 빛나기도 하고 빛을 잃기도 했다. 누군가는 타고난 선천적 재능으로 인해 적은 노력으로도 타고난 성과를 자랑하며 늘 자랑스럽게 미래를 말하고 꿈을 얘기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도달할 수 없는 벽에 막히거나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 늘 분주한 싸움만 하다 힘을 잃고 쓰러지거나 말없이 외로운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잘못된 고리를 풀어나가야 할까?’라는 뜬금없는 물음은 늘 힘없는 교사의 가냘픈 음성에 머물고 말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거부하거나 무소유를 외치는 것이 모순인 것처럼, 학교에서 경쟁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거나 공부가 최고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애써 스스로를 멋지게 포장하며 수많은 패배자만 남기게 되는 변명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 힘없는 존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러한 자본주의의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 속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보다 덕성과 가치가 중요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승자가 되어야만 제대로 인정받게 된다. 아무리 덕성이 뛰어날지라도 자본주의 사슬 속에서 제대로 부와 권력으로 빛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러한 덕성은 결국 가난 속에서 미덕 없는 굶주림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경쟁에 승리해야 함을 강조하며 일류대를 지향하는 것 또한 어쩌면 이러한 생존의 사슬 속에서 아이들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사슬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래도 조금은 순수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본주의의 사슬 속에 갇히기 싫다는 열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금수저의 부모님이 뒤에서 든든하게 봐주고 있다는 배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와는 다르게 자본주의 열차에 편승하고 싶지만 능력과 재능이 뒤따라주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은 결국 학교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쓴맛을 체험하고 패배자가 된 듯 사회로 나가게 된다.
루머도 처음부터 경쟁, 대학, 공부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인에게도 나름대로 지향해야 할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꿈을 향한 능력과 환경이라는 이중적 합주가 어긋나 절대 본인의 힘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기에 꿈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줄 테니 각자의 꿈을 적어보라고 하면 모두가 다 멋진 꿈을 적으며 즐거운 인생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보다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은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본인의 꿈을 떳떳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아니, 어쩔 수 없는 환경으로 스스로의 꿈을 죽이거나 꿈꾸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루머도 어쩌면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꿈을 말하기에 앞서 꿈을 포기하는 법을 먼저 깨닫게 됐을지도 모른다.
루머에게 메일을 보낸다. 천천히 일단 루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단순한 위로와 공감은 어쩌면 ‘당신도 뭐 똑같은 지시만 하는 교사이지’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면 결국 상대방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특히 루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다른 환경 속에서 성장한 아이이기에 더욱더 열린 마음과 포용적인 자세로 다가가야만 한다. 만약 그러한 표현이 자칫 강압, 지시, 편견 등에 의한 말로 전해질 경우 루머를 찾기 위한 발걸음은 처음부터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루머야, 선생님이야. 어떻게 잘 지내고 있니? 그래도 선생님께 연락 줘서 고맙다. 지금 현재 굳이 너의 상황을 묻고 그 흔한 안부를 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조금이나마 너의 마음을 알고 너에게 다가가고 싶다. 루머야, 선생님이 너를 한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연락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 보는 대로 선생님한테 연락 좀 주렴.
루머와 만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어느 곳에 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루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갈까? 아니면, 짧은 순간이라도 답답함을 털어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산으로 갈까? 사람들의 호흡을 느끼며 생의 풍경을 맛볼 수 있는 시장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시장에 가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어쩌면 루머가 그 풍경을 보고 지금의 자기 모습 속에서 나아갈 바를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