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회상

by 문객

신동엽 시인의 시비 앞에 앉아 루머의 답신을 기다려본다. 그가 쉽게 연락을 전해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한 번 즈음은 그를 만나서 교사와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노을빛이 깊어가는 강물 위로 땅거미가 진다. 바람도 제법 선선해지고 강변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소리도 멀어져 간다. 고요함과 적적함이 백마강의 주변을 감싸 안는다.


루머의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되나? 아니면, 오늘 하루 정도는 숙소에 머물며 그의 연락을 기다려야 되나? 루머가 부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본인의 안부가 궁금해 선생님이 여기까지 온 것을 루머가 알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구두레 조각공원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걷던 방향과 또 다른 백마강의 풍경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루머가 학교에서 보여줬던 행동과 그가 남긴 글과 흔적 사이에는 꽤 깊은 괴리가 있었다. 그가 보여준 외형적 모습은 말없고 스스로를 잘 표현하지 못하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그가 남기고 간 메모와 기록 속의 루머는 다른 누구보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였다. 이러한 괴리감을 단순하게 내면적 성향과 외향적 표현 간의 불일치로 이해하자니, 그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과 그가 보여준 행동이 너무 궁금했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아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그 무언가에 의해 괴리된 본인의 모습으로 인해 애써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행동은 드러나는 것에 쉽게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평가는 모두 다 각자만의 주관적 생각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평가에 의해 종종 무고한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루머는 어쩌면 이런 평가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내면을 찾고 자신만의 대화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아는 스스로의 자아가 굳게 자리 잡힌 루머는 그런 모습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루머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자고 다짐하며 오늘 밤은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적어도 한 존재의 행방을 찾는 발걸음이라면 그 정도의 인내와 기다림은 필요할 것이다. 구두레 조각공원 인근 숙소에 여정을 푼다. 밤이 깊어간다.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과 맥주 몇 캔으로 허기와 외로움을 달래 본다. 언제부터인지, 술이 주는 잔잔한 감성의 울림에 자주 끌리곤 했다. 그때마다 조금씩 마시던 술이, 이젠 벗이 되어간다.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단순하게 나쁜 행동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도 않다. 술로 인해 적어도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딱딱한 감성을 조율해 주는 술 앞에 굳이 부정적 메시지를 던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잔 두 잔이 지속될수록 몸이 따라와 주지 않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적막함이 깊어간다. 어딘지 모를 우울함이 찾아든다. 노래라도 들어야 이 외로움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아 김광석의 '혼자 남은 밤'의 노래를 틀어본다.


어둠이 짙은 저녁 하늘

별빛 내 창에 부서지고

외로운 밤을 홀로 지샌 내 모습

하얀 별 나를 비춰주네

불빛 하나 둘 꺼져갈 때

조용히 들리는 소리

가만히 나에게서 멀어져 가면

눈물 그 위로 멀어지네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

되올 수 없는 시간들

빛바랜 사진속에 내 모습은

더욱 더 쓸쓸하게 보이네

아 이렇게 슬퍼질 땐

거리를 거닐자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루머의 연락이 오지 않는다. 밤이 깊어간다. 루머도 김광석의 '혼자 남은 밤'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김광석의 음악에 대해 그 정도로 평가를 하고 있을 정도라면 분명 이 노래를 알고 있을 것이다. 혼자 있거나, 이별을 겪었거나, 여행을 하고 있거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갔을 때 김광석의 음악을 들으면 가장 친근한 벗이 되어 '괜찮아, 괜찮아'라며 힘을 내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 준다. 아마도 이 점은 김광석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김광석의 음악 속에 잠시 눈을 붙이는가 싶더니 새벽녘 잠을 깼다. 핸드폰을 확인해 본다. 루머의 연락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본다. 어둠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밖과 안의 경계를 나눈다. 모두 고요하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 흔들림 또한 적막함 속에 묻히어 간다. 가끔씩 어딘가를 오고 가는 이방인의 소리만이 빈 정적을 깨운다.


사범대학 시절 도종환 시인의 '어릴 적 내 꿈은'이라는 시를 노트에 적으며 꼭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시인의 말처럼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꼭 시인의 다짐처럼 '강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나룻배가 되어 주고, 길을 묻는 아이들에게 지팡이가 될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늘 이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상을 향해 좀 더 노력하지 못한 부끄러운 자화상이 늘 현실에 안주하는 법을 재촉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룻배나 지팡이가 되기 전에, 직장인으로서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갈 수 있는 수단으로써 가르침을 지속했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또 다른 내 안의 성취만을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평생 교사는 많지만, 평생 선생님은 적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는 있다. 가르침과 지도는 기술이지 교육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선생님이 될 수는 없다. 선생님은 단순하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주체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과 함께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해 그 어떤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좀 더 쉬운 길을 걷고 싶었고, 좀 더 편안한 길을 택하고 싶었다.


나를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은 교단에 서 있던 내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적어도 그들에게 나로 인해 삶의 부정적 모습을 깨닫게 하거나 인간에 대한 실망을 안겨주지만 않았다면 부끄러운 고백의 죄책감은 조금 사라질 것 같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나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죄 많고 부끄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 굳지 않는 존재다. 누군가는 조금 혹독한 환경 때문에 그 굳음이 더 빨라질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되기 전 아이들은 모두 다 무언가를 꿈꾸며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서 단정이나 확신은 어쩌면 참된 교육은 그만두고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해 습관적 배움만 지속하라는 지시와 명령이 될 것이다.


창밖으로 아이들의 눈빛이 하나둘씩 아른거린다. 장난기가 무척 심했던 아이의 눈빛도 있고, 여러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결국 마지막 내 품으로 다가왔던 아이도 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모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결국 서울 어딘가로 전학을 가며 못내 눈물을 터트리던 아이의 눈빛도 보인다. 그 아이를 찾아 집으로 가는 날이면 늘 삶의 양극단의 측면이 보이곤 했다. 누군가는 보살펴 줄 사람이 그리워 밤새 눈물을 흘리며 긴 밤을 두려움에 떨며 보내는데, 누군가는 지나친 부모님의 간섭 때문에 집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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