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확증편향에 관하여.
"이들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다른 시대나 국가, 다른 집단이나 교회, 계급 그리고 정당 등이 자기 집단과 정반대로 생각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 집단이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p.46)
소위 확증편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를 깊이 내렸는지 목도하는 요즘, 이런 사태를 지금까지 방조했던 사회 곳곳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었던 만큼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꽤나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예를 들어, 유튜브와 같은 대안 미디어들도 이런 상황을 확장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튜브 알고리즘'은 많은 사람들을 확증편향의 세계로 견인하는 목자가 되고 있다. 순수하게 유튜브 알고리즘의 어린양이 되어 따라가는 이들이 오늘 광장이나 사회 곳곳에서 행하는 일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문제는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건강한 생각, 민주적 시민의식,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그 세계를 채워가는 수많은 콘텐츠는 오롯이 '돈'이라는 목적에 의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폭주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 교회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집단 확증편향의 대표적 사례를 한국 개신교라 말해도 무색할 정도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편향적이고,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있다. 그리고 이러한 확증편향적 망상을 소위 '신의 계시'로 곡해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주 넷플릭스에서 '계시록'이라는 따끈따끈한 영화가 나왔다. 이 영화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믿고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려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기게 범인을 쫓는 형사. 어두운 현실 속 각자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난다."라고 소개한다.
영화의 내용은 소개만 읽어도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영화를 스포하면 안되기에 스토리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끝 부분에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 나온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사람을 죽이려는 목사, 범죄를 저지르면서 실은 '괴물'이 죽였다고 믿는 범죄자, 그리고 범죄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은 여동생의 환각에 괴로워하는 형사. 이들은 모두 자기 삶에 생겨난 비극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시도들은 엇나간다.
특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목사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민낯을 폭로하는 것 같다.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성민찬 목사(류준열)는 어느날 자기 교회에 찾아온 성범죄자를 만난다. 그가 성범죄자라 할지라도 교회 성도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던 성목사는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입니다."라고 호기롭게 선언한다. 마치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는 목사와 같은 그는 작은 교회를 섬기는 자신의 처지를 바꿀 기회를 찾는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오려는 순간, 범죄자와 문제에 엮이게 되는 성목사는 자신의 탐욕으로 빚어지는 모든 상황들을 '신의 계시'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산에서 사람을 절벽으로 미는 순간, 번개가 치며 어렴풋이 신의 얼굴처럼 보이는 장면,
죽었던 사람을 다시 죽이려는 순간 맑은 하늘의 구름과 햇빛이 천사처럼 보이는 장면,
그 모든 순간을 신의 계시라 믿은 성목사는 서스럼없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들이 신의 뜻이라고 여기며,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성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 끝 부분에서 삶의 모든 문제를 쉽게 해석하고,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모든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신앙인들은 삶에 찾아오는 비극을 '인과관계(因果關係)'로 설명하려 한다. 특히 삶에 일어난 모든 현상(결과)를 신의 뜻(원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한 시도는 때론 누군가의 삶을 난도질 하거나, 자신의 폭력적인 행태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 폭력은 오늘 한국 교회 곳곳에 만연한다. 이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신의 계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필요하다.
흔히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고 지칭한다. 이는 기독교가 인간의 이성이나 지적 활동 보다 신의 계시를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세시대엔 이것이 사제들이 권위를 부여받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시작되며 사람들은 신의 존재와 종교의 필요에 물음을 갖기 시작했고, 이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 오기까지 종교가 반지성적 집단으로 보여지는 원인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신의 뜻을 찾을 능력이나 방도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적인 은혜로서 신의 계시가 아니라면 인간은 절대 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극단적으로 이해되어지면서 중세의 카톨릭이나, 작금의 한국 교회는 반지성적 집단이 되어버렸고, 인간이란 존재를 굉장히 회의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미몽( 迷夢) 상태의 인간은 더 나은 상태의 인간이 통제해야 된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서스럼 없이 신의 계시라는 말을 남발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중세의 암흑기라 불리우던 시대의 카톨릭으로 회귀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아니 어쩌면, 권력과 탐욕이라는 본성에 메인 인간의 관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한국 교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계시가 아니라 계몽이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게몽은 계몽령 따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길 부탁드린다. 하지만 참으로 우리에게 계몽이 필요하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특히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말이다.
그저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모든 행태를 신의 계시라 치부하는 한국 교회가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으로 신의 뜻을 찾기 위해 계몽되어지는 사람들, 신의 도움을 구하며 계몽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어느 개신교인이 있다면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그저 편의를 위해 확증편향적 망상에 빠진 채로 살지 말자고, 그러니 함께 깨어나서 우리가 믿는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자고 말이다.
계시록이란 영화를 보며,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모습과 닮았음을 부정할 수 없는 참담함 답답함 그리고 한국 교회가 다시 깨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저리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