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 ≪ 코스모스≫

깨어있는 먼지로 살아간다는 것

by 생각마루

[서문: 티끌 속의 우주, 그리고 코스모스]


Daydream. 어두운 방, 하지만 밖은 아직 환하게 밝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양 정적이 흐른다. 나는 그 바닥에 누워있다. 어디가 아파서 라거나 잠을 자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왜인지 정신이 멍해져서 그저 한 곳을 응시하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살짝 열려있는 커튼 사이로, 아직 어둠의 시간은 아니라며 항의하듯 강렬한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며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의 기둥 속, 평소에는 존재를 감추고 눈에 보이지 않던 티끌 같은 것들이 반짝반짝 빛나며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그 반짝이는 것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어쩌면 이것이 우주라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저 반짝이는 먼지들이 태양인 것이고, 우리는 그보다도 훨씬 더 작은 어떤 티끌 위에 사는 한없이 미세한 존재일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나를 덮쳐오는 버거운 현실도 결국 다 먼지보다 사소한 그 무엇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뭘 이렇게까지 진지할 일인지. 아직 솜털이 있던 어린 시절임에도 나는 종종 깊은 몽상에 빠져들곤 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문자 그대로의 ‘몽상’. 하지만 나름 참신한 접근이지 않은가? 그것이 단순히 나의 독특한 기질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감당하기 벅찼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무의식이 빚어낸 도피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세상이 너무나도 낯설었던 한 소년은, 이렇게 방구석에 누워 우주를 그려보는 몽상을 통해 삶에 대한 아주 자그마한 실마리나마 찾고자 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그 소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과연 그 몽상은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했을까?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행성을 토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 행성은 저 광막한 우주의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소년이 방구석의 티끌을 보며 상상했던 그 우주가 실제로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하기 위해, 이제 몽상에서 깨어나 시선을 실제 하늘로, 더 먼 우주로 향해보자.


지구를 떠나 가장 가까운 곳에는 달이 있다. 약 38만 킬로미터, 시속 100킬로미터로 쉬지 않고 달린다면 160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란다.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법한 현실적 거리같이 느껴진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질주한다 하니, 장비만 좋다면 달 표면에다 레이저 쇼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 이제 다시 빛의 속도로 8.2초를 달려 이 구역의 중심으로 보이는 태양을 찍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태양계의 가장자리를 향해 나아가보자. 빛의 속도로는 4시간, 시속 100km 자동차로는 5천 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면 닿을 수 있다는 그 끝자락에는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이 차가운 어둠 속에 떠 있다. 이만하면 우주의 크기를 왜 ‘광막’이라는 수식어로 표현하는지 알겠다. 차로 5천 년이라니 내 머리로는 가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은 마치 세계일주를 가는 첫날 현관문턱을 막 넘어선 수준도 안된다는 것이 함정. 해왕성 너머에도 우주는 끝나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그 너머를 바라보자. 끝없는 어둠인 줄만 알았던 공간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별들이 암흑 속에 무수히 흩뿌려져 있고, 이런 별이 4천억 개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속한 '우리 은하'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시야를 다시 한번 확장하면, 그토록 광대했던 우리 은하마저 무한한 어둠 속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이번엔 다음 척도를 찾는 것조차 아득하다. 빛의 속도로 무려 250만 년을 달려야 비로소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이웃, '안드로메다 은하'에 닿을 수 있단다. 250만 년이라니, 이쯤 되면 숫자도 더 이상 기준이 아니라 그저 상상 속의 개념일 뿐이다.


하지만 우주의 스케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런 은하 수백 개가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으로 단단히 묶여 '은하단'을 형성하고, 이 은하단들이 다시 무리 지어 모이면 '초은하단'이 된다. 우주에는 이런 초은하단이 약 1천만 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초은하단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아니 우주를 떠받치는 뼈대처럼 얽히고설켜 이루는 장대한 구조를 우리는 '은하 필라멘트'라고 부른다. 우주는 그렇게, 우리의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끝없이 펼쳐진다.


이 압도적인 스케일 앞에서 지구라는 행성의 존재감은 ‘미미하다’는 말조차 사치스럽다. 우주 전체로 보면 지구는 그냥 ‘없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물며 그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감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방구석에 누워 먼지를 보며 "우리는 티끌 위에 사는 미세한 존재일지도 몰라"라고 했던 소년의 몽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과학이 밝혀낸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우리를 '먼지'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매 순간 생생하게 느끼는 이 ‘실존’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분명히 존재하며, 결코 하찮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한 인간이 느끼는 존재감의 무게란 때로는 저 거대한 우주에 닿을 만큼 묵직하고 거대할 때도 있다. 물리적으로는 먼지에 불과하나 정신적으로는 우주를 품는 존재. 이 냉혹한 물리적 '실재(Reality)'와 뜨거운 인간의 '실존(Existence)' 사이의 괴리. 과연 인간은 이 아득한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세상을 인식해 온 방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자취를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다. 선사시대 인류는 당장의 생존을 위해 눈앞의 자연을 빠르게 판단해야 했고, 문명이 생긴 뒤에는 자본과 권력을 좇으며 현실에 몰두해 왔다. 하지만 생존의 위협이 걷히고 물질적 욕망이 채워져 갈수록, 오히려 충족되지 않는 한 가지 근원적 의문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저 거대한 세상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명쾌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끈질긴 응시 끝에, 인류는 마침내 거대한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지금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하나의 명제, “지구는 태양이라는 별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이다.” 인류가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했다. 직관에 반할뿐더러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위협하기도 하는 이 진실은 철저히 배척되어 왔다. 하지만, 결코 가려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지식을 사랑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세상앞에 내보이고 말았다. 인류는 그렇게 탐구하고, 발견하고, 투쟁하며 세상을 이해해 왔다. 그리고 이내 우주라는 더 큰 미지를 항해하고, 그 존재의 근본을 향해 탐험해 나가기에 이르렀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바로 그 탐험의 기록이다. 이 책은 나처럼 방구석의 몽상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실제로 우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연대기이며, 그 결과로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것들’에 대한 통찰이다.


물론, 분류상 이 책은 엄연한 ‘과학’ 서적이다.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복잡한 물리 법칙과 구체적인 설명들이 가득해, 나 같은 문과생들에게는 수면제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나는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이걸 굳이 과학 서적이라고 불러야 할까?’ 출간 당시에는 최신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이 컸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코스모스에서 다루는 과학적 사실들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거나, 검색 한 번이면 양질의 콘텐츠로 습득할 수 있는 일반적 정보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칼 세이건이 과학적 사실과 역사라는 탄탄한 논리적 기반 위에 쌓아 올린 메시지, 즉 그가 오랜 연구 끝에 깨달은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달콤한 환상과 미신에 의지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안대를 벗고 차가운 우주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과연 인류는 어떤 존재인가? 인류는 어떻게 용기 있는 걸음을 내디뎌 '미신에서 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실은 무엇이며,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인가?


이제 그 장대한 여정을 따라가 보자.



[ 본문 : 코스모스를 통한 통찰 ]



인문학적 시선으로 이 책을 읽어보니, 이것은 마치 인류가 쌓아온 철학적 정수를 과학적 논리라는 단단한 뼈대로 보완해 낸 거대한 사상서로 읽혔다.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가장 강렬하게 맴돌았던 생각은 **‘코스모스(Cosmos) = 도(道)’**라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권에서 탄생했지만, 우주의 질서와 이치를 뜻하는 이 설명하기 힘든 함축적인 두 단어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놀랍도록 맞닿아 있었다. 다만, 섣불리 이 심오한 ‘코스모스’와 ‘도’의 개념을 글로 써보기에는 내 역량이 아직은 모자란 것 같다. 대신 나는 조금 더 직관적인 방법으로 이 책을 해석해 보려 한다.


1장부터 13장까지 방대하게 펼쳐진 이야기인 데다가 특별히 이어지는 순서가 없기에 읽을 때는 조금 복잡하게 느껴지는 감이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몇 가지의 뚜렷한 맥락이 흐르고 있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 인간의 존재와 의의를 묻는 ‘존재론적 관점’, 인류가 세상을 인식해 온 과정을 쫓는 ‘지성사적 관점’,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미래지향적 관점’으로 몇 개의 장들을 키워드로 묶어 정리해 보았다.

이제, 그 첫 번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1부. 존재론적 관점: 인간의 존재와 의의

첫 번째 이야기: 별들의 삶과 죽음 (9장)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단순히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존재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인간의 직관은 초라하기만 하다.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결국 봉착할 수밖에 없는 이 근원적인 의문은 고대 인류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사냥에 성공해 배를 채우고 모닥불가에 둘러앉은 밤, 문득 침묵 사이로 스며드는 질문이 있었다. "이 갈증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가?" 하지만 답은 없었고, 미궁 속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거대한 뱀이 세계를 낳았고,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신화는 답 없는 밤을 견디게 해 줄 횃불이었다. 하지만 신화라는 횃불만으로는 '무지'라는 어둠을 완전히 쫓을 수 없었다. 인류는 결국 신이 만든 이야기 뒤에 숨는 대신, 두려움을 무릅쓰고 어둠 속의 실체를 직시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인간은 신화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상을 재단할 용기를 갖추기 시작했다. 비록 우주를 볼 망원경도, 미시 세계를 들여다볼 현미경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고대의 학자들은 오직 날카로운 '이성' 하나만을 무기로 세상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어떠한 관찰 도구도 없이 오직 순수한 추론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자'와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놀라운 통찰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그 원자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의 재료가 원자라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그 재료가 어디서 탄생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최초의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 이래, 인류는 수백만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과학의 정교한 도구를 얻어냈고, 원자(原子) 세계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우주로 돌렸을 때, 우리는 경이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가장 작은 세계의 기원이 가장 거대한 우주 속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 즉 미시와 거시 세계가 하나의 원리로 이어져 있다는 진실이었다. 칼 세이건은 그《코스모스》 9장에서 현대 천체물리학이 밝혀낸 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태초의 우주는 현대 물리학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상태, 혹은 완전한 무(無)로 여겨진다. 그곳에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특이점’이 발생했고, 강력히 응축된 에너지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빅뱅’이다. 이 순간 공간과 시간이라는 물리학적 좌표계가 탄생하며 우리의 세상인 코스모스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급팽창 직후, 확산되던 에너지는 온도가 떨어지며 물질로 상전이 한다. 이것이 양성자, 중성자, 전자—우리가 물질의 기본 단위로 여기는 입자들이다. 온도가 충분히 낮아지자 이들은 융합하여 원자를 형성한다. 대부분은 양성자 하나 혹은 둘에 전자 하나 혹은 둘이 결합한 수소와 헬륨이었다. 초기 우주는 오직 이 단순한 원자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지금 우리가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원자, 원소, 분자 등 생명을 구성하는 복잡한 재료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탄소, 생명의 숨결인 산소, 피를 붉게 물들이는 철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칼 세이건은 그 해답으로 밤하늘의 모든 별들을 가리킨다. 그에 표현에 따르면 별은 단순히 빛나는 조명이 아니라,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핵융합 용광로'이자 '위대한 연금술사'이다.


물질의 탄생은 현대의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물리학 법칙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자가 질량을 갖추자 일부 수소와 헬륨 구름에서 중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력은 거대한 가스구름을 형성하고, 일부 가스구름들은 더 큰 중력으로 뭉쳐 기체상태인 1세대 별을 형성한다. 별의 중심부에서는 엄청난 중력이 물질을 짓누른다. 이 압력으로 온도가 수백만 도까지 상승하면 핵융합이 시작된다. 수소가 헬륨으로, 헬륨이 다시 더 무거운 원소로 변환되는 우주의 연금술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렇게 중심부의 높은 온도와 압력 속에서 탄소, 산소, 질소, 철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하나씩 합성된다. 또한 이 핵융합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별이 뜨겁고 빛나는 이유다.


이렇게 별들은 짧게는 수백만 년, 길게는 수천만 년의 세월 동안 뜨거운 중심부에서 가벼운 원소를 융합해 무거운 원소를 요리해 낸다. 그리고 그 삶이 다했을 때, 특히 거대한 별들은 장렬한 폭발 ‘초신성’으로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우주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진다. 별이 폭발하며 내지르는 최후의 비명과 함께,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탄소, 산소, 질소 같은 귀한 원소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이 죽은 '별의 먼지'는 성간운을 떠돌다 중력에 이끌려 다시 뭉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새로운 별(태양)이 태어나고, 남은 찌꺼기들이 뭉쳐 행성(지구)이 되고, 그 위에서 마침내 우리가 태어났다. 세이건의 말처럼, 이것은 시적 비유가 아니라 건조하고 명백한 물리적 사실이다.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별의 죽음을 먹고 자란 존재들이다. 내 오른손의 원자는 저 멀리 어떤 별에서 왔고, 왼손의 원자는 또 다른 별에서 왔을지 모른다. 우리는 우주의 광활한 시간 속에서 잠시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재활용된 별의 파편들이다. 우리는 별에서 와서 잠시 머물다, 죽음이라는 경계를 지나면 다시 원자로 흩어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간다.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거대한 코스모스의 순환 고리인 셈이다.


그러나 별의 먼지가 뭉친다고 해서 언제나 '생각하는 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별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었지만, 의식까지 주지는 않았다. 차가운 먼지 덩어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우주에서 가장 기막힌 우연과 필연의 교향곡이 필요했다.



두 번째 이야기: 우주 생명의 푸가 (2장)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세상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질서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주의 변방, 존재감조차 없는 행성 하나인 지구에서는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40억 년 전 지구의 원시 바다에서, 별의 먼지들이 서로 뭉쳐 자기 자신을 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칼 세이건이 2장에서 한 말을 빌리자면, “긴 시간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가능한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바꾼다.”


최초의 단세포에서 시작해 바다를 헤엄치고, 육지로 올라와 마침내 도구를 쥔 인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겉모습이 다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참나무나 인간이나 결국 똑같은 유전적 언어로 쓰여 있다. 이 공통의 언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했음을 증명한다. 장구한 시간 동안 서로 다른 모습을 갖춰왔으나, 결국은 하나의 유전적 언어로 '코스모스'를 그려내는 '생명'이라는 존재는, 서로 다른 악기가 하나의 주제를 끊임없이 변형하고 발전시키며 연주하는 음악 형식인, '푸가(Fugue)'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장엄한 푸가에는 지휘자도, 악보를 쓴 작곡가도, 최종 악장도 없다. 자연은 그저 무작위로 변화했을 뿐이며, 그 속에서 수많은 진화와 돌연변이가 일어났고 적응하지 못한 것들은 멸종되어 갔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한다는 것은, 40억 년 동안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죽음과 선택의 이어달리기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장 우주 생명의 푸가>에서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한다. 일본의 내해 단노우라에서는 등딱지 무늬가 무서우리만치 사무라이의 얼굴을 빼닮은 게 들이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12세기경 숙적 겐지 파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헤이케 파 병사들이 이 단노우라 내해에서 수없이 전사했다는 것이고, 그 망령들이 게가 되어 아직도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그 사무라이 형상의 게들을 '헤이케 게'라고 부르며, 어부들은 이 게가 잡혀 올라오더라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이 전설은 일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 사무라이 게들이 번성하게 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인위 선택'에 의한 선택압의 영향으로 일어난 결과다. 사람들이 헤이케 게들을 계속해서 놓아주고 다른 게들은 잡아들이니, 사무라이와 더 많이 닮을수록 생존과 번식의 확률이 급격히 높아졌다.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마침내 단노우라에는 엄청나게 많은 헤이케 게들이 서식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위적 선택 하나가 한 종의 형질을 이렇듯 변화시킬 수 있을진데, 40억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연이 행사해 온 '자연선택'의 힘은 얼마나 강력했겠는가. 영겁의 시간 동안 자연은 수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변화시켜 왔고, 그 속에서 생존해 가는 생물들의 모습 또한 계속해서 변해갔다. 생물 세계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은 모두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는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헤이케 게의 사무라이 얼굴은 망령의 환생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역시 자연이 '의도'한 최종 목표가 아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은 결코 최종의 형태도, 최선의 결과도 아니다. 단세포 생물도, 헤이케 게도, 인간도 모두 무작위적 변이와 선택압이라는 동일한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과연 인간이 단세포 생물보다 '더 진화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에 우열은 없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우연과 시간이 빚어낸 기적이며, 그렇기에 존재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맹목적인 진화의 과정 끝에서, 단 하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 무작위적인 자연선택이 빚어낸 우리 인간의 뇌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자신의 기원인 밤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의식적으로는 우주를 되돌아볼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우주는 우리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1장)


… (중략) … 하나하나가 우주의 외딴섬인 셈이다. 이렇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섬들 중에는 진화 단계에서 지성을 갖추게 된 생물들이 생겨난 곳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제가 살고 있는 알량한 행성이나, 변변치 못한 별 여남은 개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 것이다. 인류는 지구에 고립된 채로 성장해 왔으나 이제는 서서히, 그것도 제 스스로 코스모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코스모스 : 1장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중>


우리가 마주한 우주는 영원하고 무한한 시공간이다. 그 무한한 어둠 속에서, 우리의 토대인 지구는 우연히 에너지를 품은 별 하나에 의존해 겨우 얼어붙지 않고 떠다니는, 존재를 찾기조차 힘든 미세한 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우리가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이 행성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칼 세이건이 명명했던 것처럼, 그저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티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적막한 먼지 알갱이 위에서, 기이한 우연이 겹쳐졌다. 긴 시간이 빚어낸 복잡한 분자덩어리의 융합과 맹목적인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지성'이라는 독특한 도구를 개발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어떤 위대한 목적이나 설계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장구한 역사를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일 확률이 크다는 사실뿐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에라토스테네스의 사례를 보자. 그는 우주선은커녕 망원경조차 없었지만, 오직 막대기 하나와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인간의 '이성'만으로 지구의 거대한 둘레를 측정해 냈다. 인류는 그렇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두려움을 떨치고 바다로 나갔으며, 마침내 대기권 밖으로 지성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었다. 먼지 한 톨 보다도 하찮은 존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무한한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기 시작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막대기에서 시작된 그 호기심이, 오늘날의 우리를 별들에게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두에 던졌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명확하다. 나는 죽은 별의 잔해(9장)이며, 40억 년 진화의 생존자(2장)이고, 우주의 광막함 앞에서도 탐구를 멈추지 않는 용기 있는 여행자(1장)이다.


인류는 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코스모스 : 1장 코스모스의 바닷가 중>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것은 우주가 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광대한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우리는 결코 외로운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코스모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 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끝없는 무지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 토마스 헉슬리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무한한 앎의 대륙에 당도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유튜브에만 들어가도 원하는 정보를 언제든 찾을 수 있고, 분기마다 쏟아져 나오는 생성형 AI 신기술들은 손가락 몇 번 까딱하는 것만으로 수백, 수천 년간 축적된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방대한 정보와 기술은 결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천 년간 인류가 본능적인 두려움과 편안한 미신에 맞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검증하며 쌓아 올린 '특수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 특수한 노력이란 바로 이성적 판단, 치열한 검증, 그리고 때로는 믿고 싶었던 신념마저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 즉 '과학적 사고'다.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인류가 이 차가운 이성의 끈을 놓고 안일함에 빠졌을 때마다, 지식의 섬은 순식간에 무지의 파도에 잠식당했고 우리는 다시금 어둠 속을 헤매야 했다. 다시 그 막연한 어둠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이성의 횃불을 꺼트리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류는 과연 어떻게 달콤한 거짓 대신 쓰라린 진실을 선택해 왔는가? 이제 그 치열했던 투쟁의 역사, '미신에서 과학으로' 나아간 인간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해 볼 차례다.



2부. 지성사적 관점: 미신에서 과학으로


네 번째 이야기: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3장)


과학이 없더라도 우리가 자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태양이 내리쬐면 대지는 따뜻해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밤낮의 길이가 바뀌고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달라진다.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 바다의 높이에 달이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하늘은 단연 경외로운 것이었고, 하늘의 움직임이 실제로 엄청난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은 수백만 년간 검증된 경험적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들 또한 우리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늘에 있는 것이니, 저것들 또한 어떤 신통한 힘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흘러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인류에게 있어 미지나 무지로 인한 불안감은 가장 성가신 것들 중 하나였고,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면 어떤 설명이라도 필요했다. 나라는 존재가 신비한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내 운명이 별들의 배치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믿음은, 불확실한 삶을 견디게 해주는 달콤한 마취제였다.


이런 심리적 욕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형태의 믿음 체계를 형성했다. 동양에서는 단지 비슷한 크기로 하늘에 떠있으면서, 하나는 밝은 대낮에 나타나고 하나는 어두운 밤에 나타난다는 이유만으로, 태양과 달에 동등한 위상을 부여했다. 이렇게 태양은 양(陽)의 기운을, 달은 음(陰)의 기운을 관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동양에서는 해와 달의 운행을 우주의 질서와 만물의 생성을 나타내는 핵심 원리로 여겼다. 서양에서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에 이름을 붙이고 움직임을 관찰하며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이 생겨났다. 그들에게 하늘은 평평한 천구(天球)였고, 별들은 그 위에 박힌 빛나는 점들이었다. 그들은 그 반짝이는 별들을 이어 패턴을 만들어 냈고, 그 속에서 자연의 질서를 읽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의 천문학은 이 모든 믿음이 피상적 정보를 통한 억지로 조작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준다. 실제로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거대한 항성이고, 달은 그 빛을 반사하는 작디작은 위성에 불과하다. 물리적 크기나 성질, 그 어떤 것으로 따져봐도 지구에게 있어 해와 달은 결코 동등한 위상을 가질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을 아무리 이어 붙여 패턴을 만들고, 움직임을 관찰하고 각도를 재어봐도 실제적으로 우주라는 광막한 공간에서 별들이 갖는 위치정보와는 전혀 들어맞지 않아 아무런 인과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행성의 움직임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은, 결국 측정 불가능한 무작위 데이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우리의 본능이 만들어낸 환상, 즉 미신에 불과했다. 이 사실은 이제 현대인에게 상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점성술에 열광한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이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우리는 오랫동안 하늘의 별에 운명을 맡기고 싶어 했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에서 칼 세이건은 고대의 인류들이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얻은 지식들을 잘 활용하여, 계절의 흐름을 읽고 자연재해를 예측하여 생존력을 높여간 사례를 설명해 간다. 이렇게 관측을 통해 ‘현상의 배후를 의식’하는 능력으로 인간은 원시적인 천문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수학과 문자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천문학적 발전의 가도에 인간의 달콤한 심리적 요구와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이 교묘하게 섞이기 시작하며, 점성술과 같은 이상한 사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학의 영역을 신비주의와 미신이 치고 들어왔다.”라고 칼 세이건은 말한다.


그리고 17세기, 이 달콤한 환상에 균열을 내고 차가운 진실을 향해 걸어 들어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바로 천체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다.


16세기말 유럽은 인간의 정신이 교회라는 족쇄에 묶여 자유를 잃은 시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타올랐던 이성의 불꽃은 꺼진 지 오래였고, 인류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믿음’이라는 이름의 안대를 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 시대에 안대를 벗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행위는, 시도조차 죄악으로 여겨졌다. 설령 발전된 과학으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해도, 교회가 정한 틀에서 벗어난다면 침묵해야만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택하지 않으면 재판받고, 고문당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야만의 시대였다.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개신교 신학교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정식 교육을 받았을 만큼, 처음에는 철저히 신학이 정해놓은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그는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신이 완벽한 기하학적 원리로 우주를 ‘설계’했다고 믿었고, 천체의 궤도는 가장 고귀한 도형인 ‘원’이어야 한다는 2,000년 묵은 고정관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학이라는 그릇은 그의 탐구심과 독립심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비좁았다. 그에게는 당대의 성직자나 학자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던 결정적인 무기가 하나 있었다. 자신의 신념보다 관측된 ‘사실’을 더 존중하는 ‘지적 정직성’이었다.


이 정직한 탐구심은 그를 당대 최고의 관측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에게로 이끌었다. 귀족 출신의 튀코는 케플러의 재능을 이용해 조수처럼 부리면서도, 평생을 바쳐 축적한 방대한 천체 관측 자료를 그에게 온전히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기묘하게 작동했다. 튀코가 방광염으로 급사하면서 모든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렇게 케플러는 운명적 난제인 '화성의 기록'을 손에 넣게 된다. 그는 이 데이터를 이용해 자신이 믿어온 '고귀한 원 궤도'를 증명하기 위해 수년간 씨름했다. 그러나 계산을 거듭해도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남았다. 약 8분, 0.13도. 맨눈으로는 식별조차 불가능한 미세한 오차였다. 당시 기준으로 이 정도는 관측 실수로 치부해도 그만이었다. 아름다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데이터를 수정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플러는 타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평생을 지탱해 온 신학적 신념을 포기하고, 관측 데이터가 가리키는 불편한 진실을 선택했다. 행성은 신성한 원이 아니라,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결단은 단순한 학문적 수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계몽과 혁신의 마중물이었다. 그로 인해 마침내 인류의 눈을 가리고 있던 1,000년 묵은 도그마가 걷히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무대 뒤편에 유폐되어 있던 과학적 이성을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과학 문명은, 8분의 오차 앞에서 기꺼이 자신의 믿음을 배반했던 그의 용기 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차가운 계산이나 복잡한 실험 도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케플러의 사례가 보여주는 과학의 본질은 따로 있다. 바로 '과학적 사고'를 유지하려는 태도다. 학자이건 아니건,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불쾌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이 되기도 하고, 중요한 진실을 외면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의 도약은 항상 이런 본능을 통제해 낼 때 비로소 가능했다. 탐구하고, 관측하고, 실험하고, 가장 아끼던 신념일지라도 검증된 진실과 모순된다면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용기.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인류는 바로 이런 용기 덕분에 신비주의라는 미몽에서 깨어나, 비로소 과학의 눈으로 우주와 세상의 진짜 모습을 인식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케플러 이전의 시대는 어땠을까? 인류는 본능에 취약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이성을 포기하지 않는 종이다. 1,000여 년간의 암흑기 이전에도 틀림없이 누군가는 이성의 불꽃으로 세상을 밝혀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불꽃은 어디에서 타올랐으며, 그 이성을 잠식해 버린 도그마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시곗바늘을 케플러의 시대로부터 2,000여 년 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한 갈래를 이룬, 지중해의 작은 지역 이오니아(Ionia)로. 바로 그곳에서 인류 최초의 과학적 사고가 꽃을 피웠고, 또 사그라들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 밤하늘의 등뼈 (7장)


기원전 6세기, 무대는 동부 지중해에 흩어진 섬들, 이오니아(Ionia)다. 이곳은 강대국들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변방이었고, 동시에 수많은 문명이 교차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를 비롯 당대 최고의 문물이 이곳에서 뒤섞였다. 이런 환경은 독특한 자유를 낳았다. 절대적인 권력이 군림할 여지도, 하나의 도그마가 사람들을 지배할 필요도 없었다. 각 도시국가는 독립적으로 번영했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화, 서로 다른 관습, 서로 다른 지식 체계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집트인의 신화와 페르시아인의 신화가 다른데, 둘 다 진실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내린 결론은 대담했다. 진실은 신화 속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있다는 것. 세상은 신들의 변덕스러운 혼돈(Chaos)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체계라는 것. 이오니아 인들은 이 새로운 우주관에 **'코스모스(Cosmos)'**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만이 가진 것으로 보이는 특수한 능력인 이성, 자유로운 탐구를 통해 이성으로 우주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 바야흐로 인류 최초의 지적혁명, 이성의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작점에 이오니아 최초의 과학자, 밀레투스의 탈레스가 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제 자체의 옳고 그름 따위에 있지 않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혁명적’인 그의 접근 방식이다. 그는 사납게 내리치는 번개를 보며 신의 분노를 떠올리는 대신, 그 이면에 숨겨진 물질적인 원인을 찾으려 했다. 탈레스는 복잡한 세상을 하나의 근본 물질로 설명하려 했는데, 이는 현대 과학자들이 쿼크와 전자로 우주를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오직 물질의 법칙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탈레스가 피워낸 이성의 불꽃은 섬들 사이로 옮겨 붙으며 점점 더 크고 밝게 타올랐다. 탈레스의 친구였던 아낙시만드로스는 막연한 추측 대신 실험과 측정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려 했다. 그는 막대기 하나(영침)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를 고안했고, 알려진 세계의 지도를 그렸으며, 다윈보다 수천 년 앞서 생명의 ‘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다 건너의 코스섬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히포크라테스가 의술을 신성으로부터 해방시켜 물리학과 화학적 기반 위에서 재정립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라며 현대 물리학의 핵심인 원자론을 기원전 5세기에 이미 간파해 냈다. 또한 기원전 3세기,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란 아리스타르코스는 월식을 관찰하며 당시 신의 존재로 여겨졌던 해와 달의 위상을 이성적으로 판단해 내어 지구와 우주의 관계를 올바로 추론해 내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토록 찬란했던 이성의 불꽃은 왜 그 이후의 시대까지 세상을 밝히지 못했을까? 이오니아에서 시작된 실험과 실증의 전통은 왜 꽃을 피운 지 불과 300년 만에 쇠퇴하고 말았는가?


과학사 연구자 벤저민 패링턴(Benjamin Farrington)은 그 원인을 인간의 본성이 불러온 **‘안일함’**에서 찾는다. 앞서 이오니아에서 과학이 태동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그 지정학적 위치, 즉 ‘교류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바꿔 말하면 곧 ‘상업의 중심지’라는 의미가 된다. 처음에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과학’과 ‘효율을 중시하는 상업’이 각자의 성장세를 그리며 이오니아의 부흥을 함께 이끌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위태로운 균형은 깨져버렸다.


당시 그리스는 철저한 노예 사회였다. 상업의 부흥으로 부가 축적되자 노예 소유는 더욱 보편화되었다. 점차 육체노동은 모두 노예들이나 하는 천하고 비루한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과학’ 또한 손을 쓰는 육체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하고, 도구를 깎고, 무게를 재는 일은 모두 노예의 몫인 '손'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헐값에 부릴 수 있는 노예들이 넘쳐나니, 굳이 육체적 수고를 덜어줄 기술을 개발할 동기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손을 쓰는 일을 경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오니아의 실용적이고 실험적인 전통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엘리트주의적 신비주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실험을 천시하고, 오직 순수한 수학적 사유만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 믿었다. 이러한 사조는 플라톤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는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했고, 진실은 오직 머릿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이데아(Idea)에만 있었다. 그들은 “별을 관측하는 행위는 영혼을 타락시킨다"며 천문학에서 관측을 배제하려 했고, 복잡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완벽한 도형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데 몰두했다.


결국 안일함에 젖은 이성과 엘리트주의적 관념론에 의해 과학은 급격히 몰락해 갔다. 실제로부터 눈을 돌린 지식은 공허한 관념론으로 흘러갔고, 현실을 검증하지 않는 믿음은 다시 도그마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설파한 형이상학적 철학이 그리스를 물들이면서, 이오니아의 자유로운 상인들이 가졌던 실용적인 탐구 정신은 '천박한 것'으로 치부되어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 대가는 실로 혹독했다. 인류는 이미 기원전에 지동설을 발견하고 원자의 존재를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발견들을 스스로 파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의 감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물리 법칙 대신 신비주의와 미신에 열광했다. 이오니아의 불꽃이 꺼진 자리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이 어둠은 중세라는 인류의 긴 암흑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앞서 3장에서 만난 케플러가 8분의 오차와 싸우며 다시 이성의 눈을 뜨기까지, 인류는 무려 20세기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생각해 보라. 만약 이오니아의 정신이 꺾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케플러보다 훨씬 더 일찍 우주의 법칙을 깨달았을 것이고, 지금쯤 인류는 다른 별에 도달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케플러의 위대한 용기가 '개인의 승리'였다면, 이오니아의 몰락은 명백한 '사회의 실패'였다. 손을 쓰는 수고로움을 경멸하고, 관념적 미학에만 빠져 현실 검증을 게을리했을 때, 문명이 얼마나 처참하게 퇴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이오니아의 몰락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검증하는 수고'를 마다하고 '달콤한 관념'에 빠질 때, 그리고 실용적 가치를 경시하고 특정 계층의 지식 독점을 용인할 때,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미래의 경고장이다.


물론, 마음의 기반이 다져지지 못한 상태에서 이 복잡다단한 세계 속 자신의 초라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도 아프고 힘겨운 일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적당한 착각과 합리화는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생존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달콤한 환상 속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결코 올바로 바라볼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지위가 세상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진통제가 병을 치료해주지 않듯, 현실을 외면한 안락함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개선해 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눈을 가린 채, 도그마가 떠미는 대로 이리저리 표류하는 삶을 살게 될 뿐이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 더 중요한 존재로 거듭나길 원한다면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당연해 보이는 것에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아프더라도 기꺼이 진실을 마주하려는 '성실함'이다. 이오니아 인들이 실패하고, 케플러가 힘겹게 되살려낸 이 용기와 성실함. 이제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우리는 이 위태로운 행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우리가 미래를 위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3부. 미래지향적 관점: 알아차림과 실천


여섯 번째 이야기: 천국과 지옥 (4장)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아도 본인만 행복하다면 딱히 트집 잡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안일한 환상을 걷어내라느니, 차가운 진실을 마주하라느니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지적인 만족감을 위해서는 아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살아있는 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안일함은 결코 그 사람 하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주변 사람에게, 우리가 속한 거대한 사회에게, 그리고 마침내 세상 전체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다. 이것이 바로 냉혹한 우주에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성찰하고 검토하여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일’과 같이 성가신 것들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는 지구에서 스스로 종말을 지연시킬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유일한 종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만 할 엄중한 생존의 책무다.


칼 세이건은 <4장 천국과 지옥>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웃 행성, 금성(Venus)의 이야기를 꺼낸다. 오랫동안 인류에게 금성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아름다움의 상징, ‘미의 여신’이었다. 망원경으로 금성을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은 행성 전체를 감싼 두꺼운 구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구름 아래에는 지구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며, 공룡 같은 거대 생명체가 뛰어노는 울창한 열대 우림이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것은 인류가 우주에 투영한 또 하나의 달콤한 환상,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탐사선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착륙하여 보내온 데이터는 우리의 낭만적인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그곳은 섭씨 470도가 넘는 납이 녹아내릴 정도의 열기, 지구의 90배에 달하는 살인적인 기압, 그리고 맹독성 황산 비가 내리는 완벽한 ‘지옥’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아름다운 여신을 이토록 끔찍한 마녀로 만들었을까? 금성은 전 행성 규모에서 대참사가 벌어진 내행성계의 비극적인 세계다. 그 원인은 바로 대기를 가득 채운 이산화탄소가 만든 ‘온실 효과’였다. 두꺼운 이산화탄소 층이 태양 열기를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는 담요 역할을 했고, 이것이 걷잡을 수 없는 악순환을 일으켜 행성 전체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금성의 지옥 같은 풍경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서늘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도 막상 남의 일처럼 여겼던 ‘온실 효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행성 하나를 통째로 태워버린 명백한 물리적 실체였다. 행성의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를 망각한 채 금성을 지옥으로 만든 그 실험을 지구에서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를 태워 대기 중으로 이산화탄소를 쏟아내고 있으며, 지구의 허파인 숲을 제거하고 있다. 인류는 기후의 장기적 변화가 가져올 파국을 애써 무시하며, 당장의 편안함이라는 ‘달콤한 마취제’에 취해 있다.

금성은 우주가 우리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장’이다. 우리가 과학적 진실(데이터)을 외면하고 안일함에 빠져 있을 때, 천국은 언제든 지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구는 참으로 작고 연약한 세계이다."라고 한 칼 세이건의 이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후학을 연구하고, 비교행성학적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절대적인 생존의 이유다.


이제 시선을 금성에서 다시 우리 발밑, 지구로 돌려보자.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다. 이 위태로운 행성 위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일곱 번째 이야기: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13장)


시선을 돌려 다시 우리 자신을 보자. 인류는 지난 100만 년간, 내 눈앞의 지구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우리가 ‘코스모스’, 즉 이 거대한 우주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 긴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인류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한다면, 우리가 우주를 이해한 시간은 0.1초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어린아이와 같다.


문제는 이 어린아이가 너무나 위험한 본능을 품은 채, 감당하기 힘든 힘을 손에 쥐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수백만 년간 진화시켜 온 습성들—다름에 대한 적개심, 도그마에 대한 안주,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은 원시의 숲에서는 포식자로부터 나를 지키고 부족을 단결시키는 훌륭한 효율성을 발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핵무기와 기후 위기라는 초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 낡은 본능들은 더 이상 생존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인류라는 종 자체를 **‘자기 파괴’**로 이끄는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우주를 둘러보라. 대부분은 생명이 서식한 적 없는 침묵의 세상, 불모의 땅들이다. 그 척박한 어둠 속에서 우리는 생명이 움트는 지구라는 행운, 그중에서도 희박한 확률을 뚫고 지성까지 갖춘, 그야말로 **‘우주적 행운아’**들이다. 그런데 이 기적 같은 행운을 거머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지구의 생존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저 광막한 우주에서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 줄 수 있겠는가?


칼 세이건은 인간들은 안타깝게도 종의 생존에 대한 염려보다는, 파괴적인 행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꺼내든 키워드가 바로 핵전쟁이다. 그는 냉전 시대의 광기를 목격하며 탄식했다. 인류는 단기적 안정과 이익을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해 왔고, 그 결과 이는 전 지구를 몇 번이나 초토화하고도 남을 만큼 쌓여가고 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나까지 죽어야 하는 이 명백한 ‘자기 파괴적 경쟁’에 우리는 지구라는 안식처에서 수백만 년간 축적해 낸 자원과 지성을 낭비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자살 행위이자, 지구라는 생명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실 칼 세이건이 예로 들은 핵전쟁뿐만이 아니다. 인정해야 한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존재 자체로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속성을 지닌 동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태우고, 파괴하며 문명을 유지한다. 너무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들리는가?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파괴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자연스럽게 피상적인 정보에 의존하게 되고 갖가지 아집에 갇혀 버리는 존재임을. 이것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속성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 된다. 맹목적인 본능의 노예가 아니라, 이성을 가진 주체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 통제력을 쥐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만이 가지는 ‘이성’이라는 생존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타심’, ‘측은지심’, ‘인류애’, ‘냉철한 성찰’, 그리고 ‘지적인 것에 대한 열정’. 이런 것들은 단순히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인 단어들이 아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자기 파괴의 본능을 억제하고,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지속하게 해 줄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실질적 도구**다.


안일함이라는 당장의 달콤함, 이런 것들은 집착이 심하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려 하고 결코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잡혀만 있다가는 우리의 이성과 예지는 더 이상 코스모스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가능성의 문은 닫히고, 우리는 결국 엔트로피가 지배하는 무질서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우주 어디에도 우리를 구원해 줄 존재는 없다. 지구라는 이 작고 푸른 점을 대변하고 지킬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그러니 이제 선택해야 한다. 낡은 본능에 굴복하여 자기 파괴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와 지성으로 우주의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40억 년 지구 생명의 역사가, 지금 우리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결론: 깨어있는 먼지로 살아간다는 것]



다시, 어두운 방이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 막연한 몽상에 잠겨있던 소년은 더이상 없다. 어느덧 성인이 된 나는, 나만의 세상을 비추는 불빛이 더 이상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우연한 빛줄기가 아님을 안다. 적잖은 세월을 공부하고, 관찰하고, 부딪히며 살아내 온 시간들 덕분에, 내 안에는 이성의 불꽃이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비추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티끌을 바라보며 공상을 하는 대신, 그 티끌이 품고 있는 본질을 읽으려 노력한다.


물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여전히 ‘무지’라는 어둠의 공간은 내 속의 미약한 불꽃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넓다. 조금만 방심해도 일상의 중력은 내 사유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정신은 틈만 나면 그 광막한 어둠을 핑계 삼아 안락한 환상, 즉 도그마의 품으로 도망치려 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듯,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무질서와 편견의 늪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인류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라. 이오니아의 찬란했던 이성이 안일함 속에 꺼졌을 때, 인류는 실제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하물며, 핵무기와 같은 파괴적 기술을 손에 쥔 현대 인류에게 다시 한번 이성의 부재가 찾아온다면 어떻겠는가? 그때 우리에게 닥칠 암흑기는 단순한 문명의 정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깨어있는 정신으로 우리 안의 본능을 끊임없이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무지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다. 즉, 내가 내 안의 어둠과 싸우는 치열한 과정은, 작게는 나의 삶을 구하는 일이지만, 크게는 이 연약한 행성의 지성을 지켜내는 거대한 투쟁의 일부인 것이다.


위대한 힘에는 그에 따르는 엄중한 책임이 있다고 한다. 영겁의 확률을 뚫고 우주를 인식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먼지’로 탄생했기에, 우리에게 이 검증의 수고로움은 선택이 아닌 숙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함이 달콤한 마취제를 건넬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온전히 응시해야 한다. 낡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편 가르고 파괴하는 대신, 양질의 지식으로 정신을 깨우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Self-correction)’**해 나가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그 치열한 자기 교정의 과정만이, 우리를 무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하고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낼 유일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내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이 작은 불꽃이, 더 나아가 우리 인류가 지닌 거대한 이성의 횃불이 앞으로 얼마나 더 넓고 밝게 타오를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 언제나 옳은 방향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이며,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눈에 보이는 피상적 세계에 갇혀 그저 부유하는 ‘먼지’와, 자신이 우주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껍데기 이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먼지’ 사이에는, 우주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코스모스다. 또한 코스모스가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낸 우주의 눈이자 목소리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우주는 다시 맹목적인 어둠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몽상을 멈추고, 기꺼이 눈을 떠 이 경이롭고도 냉혹한 우주와 세상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칼 세이건이 ≪ 코스모스≫를 통해 말하고 있듯, 우리가 깨어있는 먼지로서 이 우주를 사랑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이 광막한 코스모스 속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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