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운명의 파란에 흔들리지 않는 , 정신적 자유

by 생각마루

서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중의 하나라고 하는 보에티우스의『철학의 위안 』‘내 기준’에서는 생경했던 책.

내가 책을 구매하는 기준은 몇 가지가 있다. 대개 저자를 보고 구매할 때가 많고, 때로는 간단한 책의 소개에 의존하거나 심지어는 그냥 디자인이 맘에 들어서라거나, 가장 직관적이랄까 단순한 방법으로 책의 제목만 보고 결제해 버리는 경우 등 다양한 경우가 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단편적인 이미지로 구매를 하는 경우 출판사의 전략에 보기 좋게 넘어가, 독자를 낚기 위해 고심한 업자들에게 원코인을 지급하고 책은 저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경험이 대부분이긴 하다. 디자인이 이쁘기라도 하면 장식품이라도 되지… 제목에만 낚이는 경우 적잖이 부글거린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 왠지 이 책은 꼭 사야 할 것 같은 느낌. 저자? 누군지 모르겠고 일단 고전이라고 하니까 옛날사람. 철학도 좋고 위안도 좋다, 심지어 절망적 궁지에 처한 상황에서 쓴 책이라니 뭔가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철학의 위안』은 이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결론적으로, 역시 고전은 고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나에게’만’ 낯설었던 이 보에티우스라는 인물은 알고 보니 로마의 ‘마지막 철학자’ 혹은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가진, 철학사에 꽤나 굵직한 한 획을 그은 유명인이었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해 로마의 지식인들에게 알리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했을 만큼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을 지키며 당대의 철학과 가톨릭 간의 조화를 추구한 인물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다음 시대로 이어지며 스콜라 철학과 같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의 뿌리가 된다.


보에티우스의 삶은 대체로 운명의 여신이 불어주는 순풍으로 충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에티우스가 태어난 아니키우스라는 가문은 로마의 유서 깊고 부유한 귀족가문이었으니, 당대 최고의 사회적 배경과 명예를 타고난 셈이다. 다만, 약간의 굴곡이랄 것도 있어서, 그가 아직 성인이 되기 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약간의 시련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여전히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시련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는 당대 최고 유력한 귀족이자 지성인이라고 추앙받던 심마쿠스 가문의 비호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심마쿠스 가문에서의 보살핌과 교육은 보에티우스가 더욱 큰 인물로 자라 날 수 있는 강력한 토대가 되어준다.


성년에 접어든 그는 학문적 깊이나 정치적 수완에 있어서도 두각을 낸다. 그는 심마쿠스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명문가의 후광과 개인의 탁월한 능력은 양 날개가 되어 보에티우스를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20대 후반에 이미 집정관에 오른 그는 정계에서도 실제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거목으로 자라 갔으며, 이내 데오도리쿠스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내며 최고의 권력가로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본디 변덕스럽다.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던 그 순풍이 점차 힘을 잃어갔고, 마침내 보에티우스를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리려는 거센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부단한 철학적 사유와 연구를 통해 굳건한 가치기준과 윤리적 신념을 확립되어 있던 그에게 있어 정치적 부패나 사회적 불의, 혹은 비논리적 결정방식과 같은 것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행정가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이런 단호하고 다소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원칙적 태도는 그를 당시 기득권층의 눈엣가시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보에티우스 자신이 저서를 통해 고백하듯이, 특유의 독립적이고 때로는 독단적으로까지 비칠 수 있었던 그의 언행은, 그의 존재를 마치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튀어나온 못'처럼 부각했음에 분명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존재와 영향력에 불만을 품은 정치적 정적들은 점차 연대를 이루었고, 그를 견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공공연한 정치적 흐름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강직함은 마침내 자신을 중용했던 왕의 심기마저 자극하게 되었고, 이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보에티우스는 정적들의 모함과 정치적 음모에 의해 반역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는데, 이때 왕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정당한 법적 절차조차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북이탈리아의 외딴 도시 파비아로 유배된다. 결국 보에티우스는 이곳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완전히 내던져진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지인 파비아에서 쓰인 이 작품은 보에티우스가 평생에 걸쳐 연구해 온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의 철학 사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종합하여 집필한 일종의 철학적 유서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형식을 차용한 이 작품은, 가상의 보에티우스와 철학의 여신 간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저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 즉, 인간적 고뇌와 이성적 성찰 사이의 충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중에서 비합리적인 현실에 대한 탄식과 의문을 제기하는 인물인 ‘가상의 보에티우스’는 인간적인 감정과 혼란,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철학의 여신’은 논리적 사유와 지혜를 각각 대변하며, 감정과 혼란을 논리적 사고와 이성으로 이끄는 구도로 작품을 이어간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운문과 산문의 형식을 번갈아 사용하여 서술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체 산문 형식을 주된 틀로 삼되, 운문을 함께 곁들여 사유의 깊이를 정서적으로 확장시키는 이러한 구성은 자칫 논리 중심의 건조한 논의로 흐를 수 있는 대화편에 정서적 울림을 부여함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깊은 감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마치 철학과 예술의 조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시도로도 여겨지는데, 실제로 철학적 통찰이 함축되어 있는 시구들을 읽어보면, 예술적 미문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더욱 풍부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저자의 지혜와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총 5권으로 나뉘어 각각의 권에서 보에티우스가 전하고자 하는 사상이 전개되고 심화되어 가며, 그의 철학관과 세계관을 구조화 해가는 흐름을 보인다.

나는 이 5권을 개인적으로는 다시 크게 4 부분으로 나눠 이해했다. 먼저 1권에서는 인간이 왜 정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고 이성과 마음의 토대를 굳건히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2권과 3권에서는 운명이 가져다주는 행운이나 선물들은 가시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을 뿐 결코 완전한 행복이나 최고선(좋음)을 가져다줄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에게 또 다른 결핍이나 해악을 겪게 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논증한다. 그리고 4권에서는 주로 세상의 섭리 즉, 신의 의지와 운명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악한들이 오히려 더 편하게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철학적 답변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5권에서는 신의 예지와 섭리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참된 선과 신의 섭리에 가까워지려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피력하며 이 작품은 마무리된다.



제1권 보에티우스와 철학의 여신


이 작품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등장인물, ‘가상의 보에티우스’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누가 나에게 운을 타고났다고 했나? 지금 나를 보라!”라며 울부짖는 보에티우스. 최고의 명성과 영광이 일상이었던 그에게 ‘추락’이란 더욱 치명적이었으리라. 부단한 철학적 연구를 통해 단련된 견고한 정신에도 균열이 생겨, 그는 타오르는 정념에 정신을 의탁한 채 비탄에 빠져있다.

그런 그의 앞에 절대 썩지 않는 진리와 같은 실과 ‘실천’과 ‘이론’이라는 상징으로 짜인 옷을 입은 ‘철학의 여신’이 나타난다. 철학의 여신은 이성의 빛을 잃고 탐구하는 정신을 외면한 채 자포자기한 보에티우스를 질책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좌절이 아니라 치유이다.”


먹구름에 뒤덮여

가리어진 별들은

빛을 낼 수 없다네.


난폭한 남풍이

바다 위를 휘몰아치면,

바다는 사납게 요동하고,

청명한 햇빛 아래에서

유리같이 투명하던 물은

흙탕물이 되어

한 치 속도 들여다볼 수 없구나.


산허리를

휘감고 내려오는 물은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 장애물이 되어

제 길로 가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는구나.

사정은 너도 마찬가지일 지니,

침침하지 않은 맑은 눈으로

진리를 보고자 한다면,

잘 닦여져 있는 바른 길을 택하라.


덧없는 기쁨도 버리고

두려움도 버리고

헛된 희망도 버려서

고통이 들어설 자리를 허용하지 말지니,

그런 것들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정신은 구름에 덮인 것처럼 몽롱해지고

영혼은 쇠사슬에 매이노니.


『철학의 위안 : 제1권 - 7장 』


철학의 여신은 말한다.

사람이 참된 이성을 내팽개쳐 버리고 거짓된 정념을 붙잡을 때, 그 거짓된 생각은 인간의 이성에 어두운 혼미함을 초래해서 참된 통찰을 가로막는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법칙이다. 그렇기에 거짓된 생각과 감정을 놓아버리고 만물의 목적과 자연의 지향에 관해 상기하여 참된 통찰을 붙잡아야 한다.

살아가며 풍파를 겪고, 이해받지 못하고 사악한 폭도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삶의 보편적 양상임을 상기해야 한다. 현실의 처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얻을 수 없는 것과 잃을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처지를 비관하게 되는 것, 자신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이성의 빛을 가둬둘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철학을 붙잡고 있는 한 아무것도 너의 진정한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안식처는 항상 자기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형의 책들과 무형의 사상들로 쌓아 올린 마음의 토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은 종종 상처 입고 고뇌에 빠진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작가 보에티우스’는 그런 그 자신을 이해하고, 제1권에서 스스로에게 몰려오는 비탄과 고뇌를 ‘철학’이라는 단단한 성채를 쌓아 막아내려는 이성적 노력을 써내간다.

죽음이, 아니 ‘죽임’이 확정된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天地否 :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교감이 끊어져 서로 사귀지 못한다. 군자의 일에는 이롭지 않다. 큰 것(양)이 가고 작은 것(음)이 온다.

태평의 시절 다음에는 막히는 기운이 온다. 막힘의 기운을 잘 견디면 다시 태평의 시절을 맞이할 수 있다. 막상 막히고 또 막히다 보면 태평의 시절에 잘못했던 것들이 한탄스럽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성찰하기 위함이고, 앞으로 가야만 하는 인생이라면 막힘을 넘겨내고 이겨내야 한다.


『주역 12번째 괘 천지비 』


주역에 보면 위와 같은 내용의 괘사가 있다.

이『철학의 위안 』 1권의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담고 있는 듯, 읽는 내내 떠올랐던 내용이다.

주역에 의하면, ‘막힘’이란 사람의 소관이 아니다. 분명히 나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환경의 부조화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큰 흐름에 의해 막힘이 도래했다면,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여간해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주역은 이 천지비괘를 통해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할지라도 해야 일과 알맞은 태도를 갖추는 것, 바로 운의 순환에 대해 이해하고 행불행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전할 수 있는 ‘가치’들에 충실하는 사람은, 이러한 ‘막힘’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유배시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 밖에 없다.

죽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정념을 뿌리치고 이성의 단단한 토대 위에 올라설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나치에게 끌려가 '죽음의 수용소'에 내던져졌음에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쟁취해 간 그 빅터 프랭클처럼!



제2권 운명의 여신과 참된 행복 / 3권 참된 행복과 최고 선


여기서 철학의 여신은 변덕과 순환이라는 운명의 속성을 재차 설명하며, 운명의 여신이 주는 선물이나 고난이 변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어서 참된 행복과 최고 선(善)에 대한 참의미를 되짚으며, 운명이 주는 부나 권력, 명성이나 쾌락 등으로는 참된 행복이나 최고의 선(善)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고, 이것들은 오히려 인간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는 설명을 이어간다.


** 여기서부터는 최고선 혹은 거짓선이라는 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과 악(善惡) 즉, ‘착함과 못됨’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전체적인 맥락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좋음과 나쁨’의 개념으로 적용하여 읽어 보았는데, 이렇게 하니 내용이 더 매끄럽게 이해되었다. 따라서 내가 이 작품을 해설하며 계속해서 쓰고 있는 선(善)이라는 개념 또한 ‘좋은 것, 마땅한 것 혹은 동양철학에서의 도(道)’정도의 의미로 생각하고 읽어보면 적절할 것이다.


제2권은 철학의 여신이 보에티우스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내리며 시작한다.


너는 네가 이전에 누렸던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너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너를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여 슬퍼하는 일에 네 모든 힘을 소진하고 있다.


『철학의 위안 : 제2권 - 1장 』


철학의 여신은 아무리 강인한 정신을 지닌 인간일지라도 외부 환경의 변화 앞에서는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운명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변덕’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운명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베풀 때에는 그것을 어떻게 유익하게 사용할지를 고민해야 하며, 반대로 모든 것을 빼앗고 유혹하려 할 때에는 그것이 결국 나를 파멸시킬 수 있는 시험이자 전환점임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방향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다시 한번 『주역』의 이치와 깊은 공명(共鳴)을 이룬다. 주역에서는 주로 64개의 괘를 통해 이 64개 ‘운명의 수레바퀴’의 양태를 설명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을 읽어보면 “흥망성쇠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어서, 지금의 행운은 어쩌면 다가올 불행의 전조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순환의 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불행 또한 결국 지나가는 과정일 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는는 통찰에 이르게 된다.


운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삶 역시 다른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 낮과 밤의 교차, 계절의 순환, 바다의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빈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생존조차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잠시 무언가를 주었다가 다시 거두어가는 것이 운명의 일이라면, 인간이 그것을 두고 행운과 불운을 따지며 원망하는 것은 운명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 내가 겪는 일은 결국 대자연이 겪고 있는 일, 그리고 인류가 시대를 거치며 반복적으로 겪어온 보편적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이어서 철학의 여신은 진정한 행복과 '최고 선(善)’'에 대해 언급한다. 인간이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문제는 인간의 정신이 외부의 자극과 욕망에 의해 흐려져 있어 진정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여신은 끊임없이 인간을 안달 나게 하며 이성을 흐리는 쾌락과 소유의 욕망에서 한 걸음 물러서, 그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이는 마치 당장은 달콤하지만 결국 몸을 해칠 수 있는 설탕과 같은 존재에 대한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일시적인 만족과 물질적 충족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참된 행복과 최고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에피쿠로스적인 자세처럼, 쾌락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좋음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되, 자신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관찰하고 절제 속에 그것을 집착 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 권력, 육체적 쾌락 등도 분명 인간에게 유익한 ‘선(善)’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체를 이루는 한 요소에 불과하며, 전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지, 부분에 집착해서는 결코 전체에 도달할 수 없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조를 인식하고, 한 걸음 떨어져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운명이 제공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집착하는 한 자유는 없다.


名與身孰親 명여신숙친 : 명성과 몸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身與貨孰多 신여화숙다 : 몸과 재산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得與亡孰病 득여망숙병 :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병인가?

是故甚愛必大費 시고심애필대비 : 지나치게 좋아하면 크게 낭비하고

多藏必厚亡 다장필후망 : 너무 많이 쌓아 두면 크게 잃는다.

知足不辱 지족불욕 :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知止不殆 지지불태 :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可以長久 가이장구 :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


『도덕경 제44장 』


제2권, 제3권의 내용은 도덕경의 제44장이 아주 함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삶에 있어 추구하고 열망하는 데에 급급하여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면, 거짓 행복을 갈망하며 참된 행복을 잊어간다면, 최고선(善)에 다가가지 못하고 인간성을 상실해 간다면, 설사 모두 얻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쇼펜하우어가 말한 바와 같이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명제를 마음에 새겨야 하는 듯하다. 핵심은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일시적 행복을 위해 계속해서 더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야기하는 요소들을 덜어내어 가는 데 있다. 거짓 행복과 위장된 선(善)으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중심을 확립하고, 외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형성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방향을 응시하고 운전대를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이나 쾌락에 급급해, 마치 만취한 운전자처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운명에 내 인생을 내맡겨 버린다면, 우리는 결코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 또한 위태로워질 뿐이다.



제4권 신의 섭리와 운명


제3권에서 철학의 여신은 돈, 명예, 권력, 쾌락 등과 같이 완전하지 못한 행복 또는 거짓된 선(善)에 대한 설명에 이어,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들의 존재가 바로 참된 행복과 완전한 선(善)이 존재함을 방증하는 것임을 논증한다. 이는 불완전한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한 것에서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러므로 보다 완전한 것을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는 참된 행복과 최고 선(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철학의 여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는 ‘신’을 최고 선의 모습으로 제시하는데, 바로 그 섭리(만유의 질서, 조화)에 따르는 것이 곧 참된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역설하며 제3권은 마무리된다.


제4권에서 보에티우스는 이 지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이 있다면 악은 왜 존재하는가? 신이 정의롭다면 어째서 섭리를 거스르며 악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벌하지 않는가? 심지어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더 많이 얻어가고 더 쉽게 살아가는, 불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섭리를 따르는 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악인이 오히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일견 보편적인 현상처럼 느껴질 만큼 자주 접하게 된다. 유사 이래의 기록들을 살펴봐도 이러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성경과 불경, 고대 동서양 철학에서부터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흐름 속에서는 늘 새로운 악인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가시적 향유’는 마치 진리의 일부처럼 행세하며 우리의 이성을 흐리고, 본능을 자극한다. 인간은 이러한 가치 충돌과 내면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 듯하다.


많은 성현과 철학자들 또한 오랜 시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 흔적들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공통된 관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바로, 악행을 통해 얻는 쾌락이나 획득은 결국 ‘일시적’이며, 마치 마른 목에 들이키는 소금물처럼 끊임없는 갈망을 불러일으켜 진정한 충만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닌다는 통찰이다.


물론, 도적단을 이루어 악행을 일삼고도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던 고대의 대악당 도척(盜跖), 그리고 자국민 200만 명을 학살하고 국가를 유린했음에도 끝내 처벌받지 않고 생을 마감한 캄보디아의 폴 포트(Paul Pot)와 같이, 악행을 저지르고도 평안히 죽은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악인의 쾌락은 일시적이다’라는 통찰이 자칫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의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생각해 본다면, 이 ‘일시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 통찰에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째, 인간에게 일상적인 것은 대개 인상적이지 않다. 반대로, 인상적인 것은 전형적인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이를테면 삶의 여러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끝에 탄생한 몇몇 억만장자를 보며 우리는 ‘성공’의 전형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의 예외일 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부단히 노력하며, 비교적 작고 소박한 성취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그래서 대개 ‘성공’의 이미지에서 배제된다.

이와 같은 인식의 오류는 ‘악인’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실제로는 악행을 저지른 이들 대부분이 그 대가로 끝없는 내적 갈망에 시달리거나, 응분의 보복과 처벌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혹 처벌받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은 몇몇 극소수의 악인들을 보며, 악행이 오히려 형통을 가져다주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이들 사례는 어디까지나 인상적인 예외일 뿐, 결코 일반적이지도 전형적이지도 않다. 단지 더 자극적이고 기억에 남기 쉬워서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예외를 보편화하는 것은 오류이며, 이들은 ‘논외(論外)’로 간주되어야 타당하다. 결코 일반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둘째는 ‘인식의 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상대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5년이라는 시간은 어떤 기준에서 보면 짧고, 또 어떤 기준에서는 매우 길게 느껴질 수 있다. 10년 후 돌아보면 지난 5년은 ‘순식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시간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오히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시간에 대한 인식은 주관적이며, 이해의 차이를 만든다.

만약 누군가 ‘1개월’을 일시적인 기간으로 받아들인다면, 악인이 누리는 5년, 10년의 향유는 결코 일시적이지 않고 꽤 지속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일시적 쾌락’은 단순한 시간의 길고 짧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쾌락이 지속성, 유익함, 내적 향상과 같은 요소가 결여된 상태라는 점이다. 이런 쾌락은 결국 단발성 자극의 연속이며, 끊임없는 갈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엔가 반드시 그 연속성이 외부의 요인 혹은 내적 붕괴로 인해 단절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닌다.

물론, 앞서 언급한 도척이나 폴 포트처럼 죽을 때까지 이 단발이 지속되는 극히 드문 예외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이런 단발성을 지속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제4권에서 철학의 여신은 “왜 악인이 번영하고 선인이 고난을 겪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한다.

앞서 논증한 바와 같이, 운명이 무작위로 가져다주는 선물이나, 악행을 통해 얻은 이익은 최고선(善)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그것만으로는 참된 행복을 이룰 수 없다. 더욱이, 악을 통해 얻어진 것들은 더욱 커다란 갈망과 위협을 수반하므로, 결국 눈앞의 달콤함과 일시적인 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한다.

행복의 본질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향유하는가에 있지 않다. 모든 생물이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갈 때 가장 건강한 상태에 이르듯, 인간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지 않고 삶 자체를 선(善)으로 채워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만이, 진정으로 최고선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미덕을 통해 선을 행하면 그 자체로 ‘선한 결과’를 얻게 된다. 이는 최고선을 향해 나아가는 한걸음이 되며, 그가 미덕을 지속하는 한 그 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선으로부터 멀어진 악인은 인간 본성을 상실한 채 존재의 가치를 점점 잃어가고, 결국 인간이라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이는 마치 아무 생명도 품지 못하는 오염된 토양과도 같은 상태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미덕을 저버리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처벌 없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며 그것을 ‘행복’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악을 통해 얻는 쾌락은 그 자체로 내면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더 큰 갈망과 파멸을 예고하는 사이클을 형성한다. 처벌마저도 피한 채 살아간다면, 그 비참함은 더욱 은밀하고 치명적으로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에티우스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반문한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세상에는 불의가 판을 치는가? 왜 악인들이 형통하고, 선인은 고난을 겪는가?

앞서 철학의 여신이 설명한 선과 악, 그리고 그에 따르는 운명과 결과는 실제 세계에서는 왜 그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철학의 여신은 다시금 ‘신의 섭리’라는 더 높은 관점에서 설명을 이어간다.

그녀는 말한다. 신은 최고의 정신이며, 그 자체가 곧 섭리이다. 그리고 ‘운명’이란 이 섭리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섭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운명의 흐름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사태를 더욱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시선에서 보이는 운명은 끊임없이 요동치며, 불규칙하고 불공정하게 보이기 쉽다.

이러한 혼란은 섭리 자체의 왜곡이 아니라, 그것을 부분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착시이다. 섭리는 전체적인 조화와 목적을 지닌 ‘절대적인 질서’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시야는 좁으며, 지성은 유한하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는 섭리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에, 세상은 그거 부조리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 섭리 안에서는 ‘좋음’과 ‘나쁨’조차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바라보는 정신의 깊이와 질적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판단될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섭리는 어떤 이에게는 선한 결과를, 또 어떤 이에게는 단련을 위한 시련을 부여한다. 악조차도 때로는 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우리 눈에는 불의처럼 보이는 일조차, 신의 섭리 속에서는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필연적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의 여신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그 어떤 운명도 미덕을 따르고 선을 지향하는 자에게는 모두 유익하다.

그것은 연단의 기회이자, 최고의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가 된다. 반대로 악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동일한 운명도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파괴의 기제가 된다.


결국, 진정한 행복은 ‘운명이 가져다주는 외적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선용(善用)’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운명이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선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최고선으로 나아가는 한걸음이 되며, 참된 행복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반대라면, 가장 큰 행운조차도 결국 해악이 되고 말 것이다.


重地坤 : 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 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 吉.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장 근원적 원리는 곤(坤 : 외유내강, 포용, 조화, 기다림)에 있다.

군자가 살아감에 있어 처음은 혼미하여도, 나중에는 얻는 것이 있으니 기다리며 겪어내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정(貞 : 쇠퇴, 죽음)의 시절에 이르렀을 때를 생각하며, 욕심내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 길하다.


『주역 2번째 괘 중지곤 』


제5권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마지막 한 가지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며, 모든 일이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은 곧, 신의 의지라 할 수 있는 섭리와 전지적 신의 예지가 실재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나아가 이 물음은 단순한 논리적 모순을 넘어, 선악에 대한 책임, 정의의 실현, 그리고 인간 행위 전체의 윤리적 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깊은 철학적 난제이기도 하다.


철학의 여신은 말한다.

완전한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참된 명제이듯, 모든 것은 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원래 의도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때 이것을 우연으로 치부하지만, 필경 이것 또한 무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일들 또한 사실 수많은 원인들의 조합에 의한 결과이다. 단지 인간들의 인식 차원에서는 이 모든 조합을 계산해 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상밖의 어떤 일들을 우연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강물의 흐름 안에서 무수히 작은 흐름과 소용돌이가 발생하듯, 섭리라는 원천에 의해 무수한 결과들의 조합들이 생겨나고 이것들이 때로는 우연의 모습으로, 때로는 필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치는 것이다.


이어서 철학의 여신은 앞선 질문, 즉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에 대한 본격적인 해명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실재하는가에 대해 논증한다.


자유의지는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특히 인간은 이성적 사고와 자기 판단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바로 이 능력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핵심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누구에게나 항상 ‘온전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섭리(*최고선으로 향하는 질서)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본질적 위치와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삶과 행동을 섭리에 조율하며 살아가는 자는 운명의 변덕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자신의 방향을 설정해 나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물질적 욕망이나 감정, 쾌락, 권력욕에 빠져 이성을 잃게 되는 자는, 곧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방향을 잃고 떠내려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강물의 흐름 속에서도 원하는 곳을 향해 노를 저어 항해하는 자와, 속절없이 휩쓸려 부딪히고 떠내려가는 자의 차이와 같다. 전자는 삶의 주인이며, 후자는 운명의 노예이다.


굳이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욕망에 가까우며, 때때로 이성의 판단을 무력화할 만큼 강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은 더 이상 원초적 무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의 힘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기르며, 이러한 동물적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을 갖춘 인격체로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가능성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섭리에 대한 이해와 이성적 수양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는 철학의 여신이 말한 바와 같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 삶의 주도권을 지켜내는 진정한 자유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러한 통찰은 역사적 사례들, 심지어 기독교 성경만 살펴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운명의 여신의 총애를 받았거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조차, 시간이 흐르며 현실의 유혹에 눈이 멀어 재물과 권력을 탐하고 악행을 일삼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렀다. 축복과 계시를 받은 존재들조차 그렇게 쉽게 타락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쉽게 흐려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지켜내고 실현하는 길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평생의 과제다.


철학의 여신은 이어서 보충해 나간다.

신의 예지는 인간의 인식 차원에서 말하는 ‘예측’이나 ‘선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은 영원한 존재이며, 그러한 신의 예지는 시간 속에서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차원에서 모든 시간을 동시에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능력이다. 즉, 신에게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사건은 영원한 ‘지금’의 시선으로 동시에 인식된다.

그러므로 신의 예지는 인간의 행위를 미리 결정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결과를 아는 것일 뿐이다. 즉, ‘알고 있음’이 곧 ‘원인 제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철학의 여신은 필연성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첫째는 ‘조건적 필연성’이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걷고 있다면, "그는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은 그 순간에 있어서 분명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 걷는 행위는 어떤 외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 필연은 행위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에 기반한 것이다.

둘째는 ‘순수한 필연성’이다. 이것은 어떤 존재의 본성 자체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깝다. 예컨대,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생명의 본질에 따른 순수한 필연이다. 이와 같은 필연은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게 발생한다.


철학의 여신은 신의 예지가 ‘순수한 필연성’이 아니라, ‘조건적 필연성’의 관점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은 각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하게 될지를, 자신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 단지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예지는 행위를 강제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를 인식하는 고차원의 직관이다.


결국,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다. 이로써 철학의 여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의 전지성을 철학적으로 방어해 낸다.

이러한 설명들을 통해 철학의 여신은, 인간의 인식 차원 안에 갇혀 신의 예지를 오해하지 말 것을 보에티우스에게 강조한다. 신은 시간에 속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와 사건을 초월적 직관으로 꿰뚫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의 바탕에 깔아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소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논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고 싶다.

예컨대, 평생 한 분야를 연구하여 숙달된 시계 장인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제 막 시계를 처음 조립해 보려는 초심자가 있다. 이 둘은 서로 직접적인 교류 없이, 장인은 단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장인의 입장에서는 초심자가 시도하는 대부분의 시행착오와 결과가 이미 눈에 훤히 보인다. 시계 조립의 원리와 변수, 결과를 모두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행위는 장인의 직관 속에서는 이미 예지 된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심자의 행동이 장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초심자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차 직관과 통찰을 얻거나, 혹은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


마지막인 제5권에서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여신의 입을 빌려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이자 끊임없는 훈련과 선택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과제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살아가라!”


얼마 전 한 호주 로또 당첨자의 비극적 최후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았다.

마지막 은행 잔고였던 19달러로 산 로또가 기적적으로 당첨되어 그는 한화 30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손에 쥔다. 그는 분명 전 세계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일확천금이라는 선물을 안겨줬지만, 이 로또 당첨자는 아무래도 이 갑작스럽고 어마어마한 행운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서 사인은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망현장인 그의 집이 마치 마약소굴과 같았다는 점과 냉장고 안에는 오직 에너지 드링크와 마약만이 가득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그의 마지막 5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기록들과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완전히 절제를 잃고 마약과 쾌락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절제를 잃고 쾌락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파괴시켜 가는 모습들…

그렇다.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행운도, 불행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가며 직접 그려가는 삶의 궤적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 나가는 그 궤적이 존재와 파멸을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절망 앞에선 그 어떤 말도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아니 보에티우스와 같이 ‘죽임’을 앞둔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켜낼 수 있는 태도는 분명히 존재한다.


부당한 정치적 음모로 처형을 앞둔 보에티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분노나 슬픔, 복수심에 잠식당하지 않고 이성의 빛을 지켜냈다. 그리고 행복의 본질과 신의 섭리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 대해 말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렇게 그는 철학의 언어로 자신을 구원했다. 비록 정적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켜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의 일부가 되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고통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악한 행위라도,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외치는『서유기 』의 저팔계에게 관음보살은 이렇게 말한다. “진심으로 선을 행하려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다. 지금 먹을 것이 없더라도, 사람을 해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도덕 명령이 아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신뢰, 그리고 그것이 결국 인간성을 보전하는 길이라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단하고 씁쓸한 현실을 맛볼 때면, 때로는 생각을 멈추고 “세상은 원래 정의롭지 않다.”라거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라는 예단에 머무르며 손쉬운 만족과 쾌락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책임의 무게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난듯하고, 행복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불과하고, 동시에 ‘삶의 주인’이라는 우리의 자리를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의 행동, 오늘의 판단, 현재를 채우는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일시적 쾌락에만 기대어 삶을 채우지 않아야 한다. 쾌락은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할 수 없다. 고단한 날들이 이어지고, 청춘이 지나고, 육신도 늙어가고,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여정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향해 살아가라.” 이 말은 단지 고귀한 이상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한 실천적 태도이기도 하다.


마치 시계 장인이 모든 것을 꿰뚫고 지켜보듯, 신은 우리의 선택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수차례 강조했듯 그것과 인간의 자유는 별개의 일이다. 초심자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의 기술을 창조해 나가듯, 인간은 자기 의지로 매 순간을 만들어가며 성숙해 간다. 그리고 그 성장이야말로, 진정한 가치이며 자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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