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이 만든 나일까

책 리뷰 <닫힌 방 / 악마와 선한 신 - 장 폴 사르트르>

by 생각마루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개 고진감래(苦盡甘來) 정도의 의미, “이 힘든 시기도 결국에는 지나가고 편안해질 거야!”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경구들 중 하나이다. 따뜻한 위로와 동시에 용기를 주어 심금을 울리는 이 문장은 많은 콘텐츠들의 제목이나 소재로도 널리 사용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경구의 본래 뜻을 살펴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주역의 이치인 월만즉휴(月滿則虧) 수만즉일(水滿則溢)의 의미를 응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가득 찬 보름달이 곧 이지러져 어두운 초승달이 되고, 물이 가득 차면 넘치기 마련이듯 흥망성쇠는 돌고 도는 것으로 “영원한 승승장구는 없으니 교만하지 말고, 시련은 찾아오기 마련이니 좌절하지 말라.”라는 이치를 담아낸 문장인 것이다.


이렇듯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는 경구나 격언들이 편의적이고 1차원적인 해석에 의해 왜곡되어 퍼져나가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나한테 와닿는 느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안일하게 보아 넘기기에는 그것들이 담고 있는 초시대적 지혜와 통찰이 너무나도 아깝다.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나오는 유명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구절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보통 우리는 이 구절을 "사람이 제일 피곤해.", "인간관계가 스트레스야.",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건 사람 상대하는 거야." 따위의 의미로 받아들이며, ‘인간관계의 고통’을 대변하는 말로 많이 사용한다. 그렇다. 이 해석 역시 어딘가 잘못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해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을 응축한 이 인상적인 구절을, 그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정도의 의미로 소비하고 마는 것은 너무나도 아쉽다.


호기심을 갖고 직접 읽어보고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이다.

널리 통용된다고 해서 혹은 권위나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이라 해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십상이다. 특히나 수많은 정보와 신호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보이는 것으로 전체를 판단하게 되는 함정에서 벗어나고 맥락을 읽어내어 ‘실존’적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직접 읽어보고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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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면서, 그간 잘 모르고 지나치던 ‘실존주의’에 대해 조금 맛보았고, 그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 호기심은 자연스레 실존주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장 폴 사르트르’라는 키워드로 연결이 되었는데 공교로운 것은 이미 나의 책장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닫힌 방]을 담은 책이 있었던 것.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표현이 일상은 물론, 웹툰과 드라마 같은 콘텐츠 제목으로도 자주 소비되는 것을 보며 그 말의 참뜻이 궁금해졌다. 이토록 널리 회자되는 문장이라면, 분명 어떤 본질적인 가치를 담고 있을 터. 그렇다면 문맥 없이, 문자 그대로 전해지는 인상만으로 그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 어느 날 이 책을 사두었던 것이다.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 장 폴 사르트르


[닫힌 방]을 펼쳐보니 분량이 굉장히 짧다. 70페이지가량에 불과한 워낙 짧은 단편. 그래서 민음사에서는 그의 장편 희곡 중 하나인 [악마와 선한 신]을 함께 수록해 출간했다. 처음에는 그냥 사르트르 찍먹의 느낌으로 [닫힌 방]만 읽어보고 덮을 생각이었으나, [닫힌 방]을 읽은 후 사르트르에 대한 묘한 호기심에 이끌려 [악마와 선한 신]까지 읽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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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

사르트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닫힌 방]은 자신의 철학을 은유적으로 잘 녹여낸 수작으로 간결한 분량에 생각을 위한 풍부한 공간을 마련해 놓은 듯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형식적인 측면과 스토리 뒤에 숨어있는 철학적 요소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우선은 우리에게 별로 익숙하지 않은 희곡의 형식이라 잠시 맥락을 놓치면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놓치기 십상이다. 그리고 간결함 속에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요소가 많아서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스토리만 봐서는 그의 메시지를 적절히 파악해 내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먼저 사르트르의 유명한 철학적 명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의 의미정도는 한번 짚어보고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러기 위해는 우선 한 번에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생소한 단어들의 의미부터 따져보면 좋다. 그가 말하는 ‘본질’이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실존’은 ‘존재 그 자체, 스스로 존재하며 그 의미와 가치를 변화시켜 가는 것’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책상을 만들 목적으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면, 그것의 본질은 책상이다. 그리고 의도에 따라 설계되고 만들어진 뒤에 목적에 맞게 사용되면서 이 책상의 ‘실존’이 존재하게 된다. 즉, 본질은 ‘용도가 정해진 사물화’의 이미지, 실존은 ‘정해진 것과 별개로 실제로 존재하며 만들어지는 의미나 가치’의 이미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그런데 앞의 설명을 토대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문장을 잘못 적용하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을 수가 있다. 구상과 설계를 통해 더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듯이, ‘사물’의 경우 대개 “본질이 실존보다 선행한다.”라고 정의해야 맞아떨어진다. 나무가 스스로 존재하며 책상이 되고 비행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용어의 의미는 대충 알았으니, 이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쉽게 앞에 한 단어를 추가해 보자.

“인간에게 있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렇게 하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 말은 신분, 환경, 외모나 기타 요소로 인한 선입견 등 한 인간을 본질로서 규정짓는 모든 것 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 그리고 그 삶의 여정인 ‘실존’이 언제나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고정적 사물이 아니기에 특정 목적으로 규정지어져서는 안 되고, 스스로의 존재감과 가능성을 느끼며 살아갈 때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문장이 본 작품 [닫힌 방]에서 주인공인 가르셍이 ‘지옥’을 느끼게 되는 상황과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지옥의 이미지’는 여러 가지 암시와 상징을 통해 나타난다.

우선 작품의 배경과 그곳에 배치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소품들에서부터 이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창문이 없는 방, 꺼지지 않는 조명, 제대로 눌러지지 않는 벨,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청동상, 종이도 없는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종이칼 등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어디엔가 하자가 있다. 본질은 정해져 있지만 사용가치가 없는 채 의미 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들, 실존적 가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들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이 방으로 들어온다.

먼저, 언론인 출신의 가르생이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여 징집되었지만, 어떤 이유로 총살을 당하게 되어 ‘닫힌 방’으로 오게 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총살당한 이유에 대해서 자신이 반전 신문을 주간했었고 그에 따라 한 어떠한 행동이 총살의 결과로 이어졌다는 애매한 단서만 남길뿐이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평판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고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정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닫힌 방’에 오게 된 이유를 불륜을 저지르는 등 자신의 아내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일축하는데, 이런 모습이 오히려 총살의 이유가 전쟁을 피한 어떤 비겁한 행위나 탈영 등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자유의지와 행동의 의도를 부정하고, 명예로운 인정만을 갈구하는 이러한 가르생의 모습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기기만’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네스 : 상관없어요. 당신이 탈영했다는 건 알아요.

가르생 : 그 얘긴 놔두쇼. 그 얘긴 절대 더 하지 말라고.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아내를 고문했기 때문이오.

[닫힌 방 中]


다음으로는 이네스가 방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우체국의 직원으로 일하며 남자 사촌의 커플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커플이 부부관계였는지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편의상 ‘남편’과 ‘아내’로 칭하겠다.) 동성애자였던 이네스는 사촌의 아내를 유혹해 그녀를 독차지하기 위해, 남편에게 싫증이 나도록 ‘가스라이팅’을 하고 그녀를 자신에게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이유로 죽게 되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밤, 아내는 이네스 몰래 가스밸브를 열어둔 채 그녀와 함께 잠에 들고 그렇게 그 둘은 생을 마감한다.


이네스 : 내가 그녀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서 그녀가 내 눈을 통해서 그를 봤어요. 결국 그녀는 내 품에 남게 되었죠.

[닫힌 방 中]


내가 살아가기 위해 남들의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런 자신의 악한 면을 직설적으로 진술하고 인정한다. 그리고 같은 직설적 방식으로 나머지 두 명의 자기기만적 모습을 걷어내고 본모습을 폭로하려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이런 이네스는 타인이 지옥이 되어가는 과정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배치된 인물로 보인다. 그녀는 타인의 치부를 드러내어 심리적인 고통을 겪게 하기를 원하며, 그를 통해 타인을 심리적으로 옥죄고 속박하려는 성향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네스 : 우리는 각자 다른 두 사람에 대한 사형집행인인 거죠.

[닫힌 방 中]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에스텔이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병든 동생의 생존과 생활의 안정을 얻기 위해 아버지의 친구 중 한 명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는 부유했으며,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생활의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랑이 결여되었던 결혼생활에서 그녀는 결국 어떤 젊은 남자와 불륜에 빠지게 되고, 아이까지 생기자 그녀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체면과 안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녀는 아기를 호수에 던져 죽이고 만다. 그렇게 에스텔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듯했지만, 허망하게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이 ‘닫힌 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에스텔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다. 단지 타인의 시선에 갇힌 자아를 넘어, 오히려 그 시선 속에 갇히기를 갈망하는 모습까지 드러난다. 이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실존적 의무로부터 도망치려는 태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거울에 대한 집착이나, 가르생의 관심과 인정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모습 속에 그녀의 이러한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그녀가 동성애자인 이네스의 관심과 인정에는 격렬하게 저항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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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이 인물들의 구도 속에서, ‘지옥’이라는 폐쇄적 상황은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명예를 갈구하는 가르생, 남자의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것에 종속되길 바라는 에스텔, 동성애적 사랑으로 에스텔을 지배하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이네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셋의 조합은 묘하게 어우러져 사르트르의 철학을 그려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완전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게 되어 발생하게 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위에서 말한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문장을 되새기며 읽어보면 그 속에 더 깊은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사람은 이미 죽었기에 이제 이승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전의 자신에 대한 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촉각을 거둘 수 없고, 더 이상 자신이 그들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어 고정적인 이미지로 굳어져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함께 ‘닫힌 방’에 있는 다른 두 사람을 계속해서 자신의 잣대로 규정해 나간다. 처음에는 그들을 사형집행인 또는 심판자로 여겼다가 또다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혹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의 본질을 규정해 나간다. 즉, 타인의 시선에 의해 주체성을 잃고 ‘사물화’되는 상황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지평 안에서 타인을 규정하고 객체화하려는 본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사물화 되는 순간,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타인의 시선에 갇혀 가능성을 잃은 존재가 되는 순간 ‘실존’을 위협받는다. 실존의 상실이란 다시 말해 나의 자유의지나 자신을 증명할 가능성이 박탈당한 채 타인에 의해 규정된 본질에 따라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물로 전락한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삶이리라.


닫힌 방 속 세 사람도 서로의 실존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보기는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르트르는 그 세 사람의 자의식을 그렇게 약하게 설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 세 사람은 어떤 이해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결코 혼자일 수 없는 그 작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식하며 영겁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실존은 의미 없이 놓여있는 청동상처럼 서서히 굳어간다.


가르생 : 청동상... (그가 그것을 쓰다듬는다.) 그래, 이제 때가 됐군. 청동상이 여기 있고 난 그걸 바라보고 있고. ... 난 내가 지옥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겠어. 당신들에게 말 하지만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이 벽난로 앞에서 손으로 이 청동상을 쥐고서 모든 시선을 받고 서 있을 걸 예견했던 거야. 나를 잡아먹는 이 모든 시선들을...... (그가 갑자기 뒤돌아선다.) 이런! 당신들 둘밖에 안 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닫힌 방 中]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인과 상호작용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본능적으로 타인을 객체화하여 평가할 수밖에 없기에 나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염세적 시각으로 이런 현실을 ‘지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눈과 귀를 닫은 채 이런 본능에 사로잡히거나 스스로를 망각하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압도당하게 될 때 우리의 삶에 지옥과 같은 고통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통찰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이 통상의 ‘위협’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자신의 실존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위협이 상존하는 불가해한 환경에서부터 실존을 지켜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르트르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의 삶을 더 조화롭게 하는 방법으로 사색이나 명상과 같은 성찰 또는 음악, 미술을 비롯한 예술과 같은 것들을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이중에서도 가장 접근이 용이한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사르트르는 지옥을 구현하기 위해 ‘닫힌 방’에서는 이 방법까지도 제거해 버렸다.


가르생 : 책이 있습니까, 이 방에?

급사 : 없습니다.

[닫힌 방 中]


초반부에 닫힌 방으로 안내되어 온 가르생이 급사에게 책이 있는지 묻는다.

이 짧은 대사는 단순한 질문을 넘어, ‘책의 부재’라는 상황에 대한 이중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는 그 방에 놓여있는 ‘종이칼’의 고유한 용도와 기능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다음으로는 이 공간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곳에는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피난처가 없으며,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통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은유한다.

그렇다. 책이란 타인에 대한 의식을 가장 덜 느끼면서도, 동시에 자신에 대해 가장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피난처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실존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전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 하나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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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선한 신]


이 작품은 혈통이나 주어진 환경, 그리고 절대적인 종교의 교리에 따라 한 인간의 가치나 삶의 무게가 결정되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희곡작품이다. 특히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해 가는데, 사르트르는 이 이야기에서 ‘본질과 실존’, ‘이상과 현실’, ‘선과 악’ 그리고 ‘절대성과 상대성’ 등과 같이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치 충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충돌들 속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길을 선택해 나가는 주인공 괴츠를 통해 시대적 통념에서 벗어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인간상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괴츠는 부유한 영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사생아였기에 평생 멸시와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삶의 경험은 그에게 종교와 사회적 통념에 대한 깊은 반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외부의 가치 기준에 얽매이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로 존재를 규정하려는 강한 열망을 품게 된다. 이렇게 괴츠는 기존의 가치 체계 즉, 종교적 교리와 그에 의해 정의되는 순종적 선의 모습을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절대악’의 길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고자 한다.


작품의 이야기는 교회의 권위에 맞선 반란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독일 최고의 용병대장으로 성장한 괴츠는 가문의 적자인 자신의 형 콘라드와 함께 대주교에 대항해 반란 세력들을 이끌지만, 이윽고 그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형을 배신하고 죽게 한다. 그리고 대주교의 편에 서서 반란세력의 본거지인 보름스 지역을 완벽히 포위해 그들의 생명줄을 거머쥐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보름스로 진군해 모두를 학살하고 그곳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나서는 괴츠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이 결정한 ‘절대악’을 실행해 옮기려 한다. 이때 보름스 지역 안에서 반란군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사제들을 살리기 위해 그곳으로 통하는 지하 통로의 열쇠를 가지고 온 하인리히 그리고 반란군의 봉기를 주도해 사제들을 죽이고 기독교적 질서를 개혁하려는 나스티가 등장한다. 이들은 보름스 학살을 눈앞에 두고 신의 의지와 선과 악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어떤 주장도 괴츠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하인리히의 한마디가 괴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인리히 : 사람들이 악 말고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도록 정해져 있다면? 신은 선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하길 바라셨어.

괴츠 : 그러니까 누구나 악을 행한다는 말이야?

하인리히 : 모두가.

괴츠 : 그리고 누구도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인리히 : 아무도.

[악마와 선한 신 中]


하인리히의 발언은 괴츠의 자유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괴츠는 음욕이나 이익이 아닌, 순수하게 악을 위한 악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주장에 따른다면 이것 또한 신의 의지라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괴츠는 결국 그들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주사위를 던져 자신이 이기면 원래 계획대로 도시를 학살하고, 진다면 포위를 풀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사랑과 선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그 논리는 이렇다. 만약 자신이 이긴다면 그것은 신이 선의 실현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학살의 책임은 신에게 있다. 반대로 자신이 진다면, 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을 선택하는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괴츠는 그의 정부(情婦) 카트린과 주사위 던지기를 하게 되고, 결과는 괴츠의 패배. 그는 이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선을 행하는 삶을 선언한다.


1막의 마지막, 괴츠가 나간 후 카트린은 고의적 패배를 위한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탄식한다. 그의 고의적 패배는 한편으로는 악을 반복해 온 삶에 대한 내면 깊은 염증과 피로를,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의지를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을 선택하려는 실존적 열망을 암시하는듯하다.


2막은 괴츠의 영지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괴츠는 앞서 선언한 대로 선을 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병권을 내려놓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스스로 절대악을 행했듯 스스로 진정한 선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사랑’이 바로 선의 진정한 모습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결코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현실에 존재하는 불평등, 노예제나 빈곤 등에서 찾은 그는 이윽고 자신이 상속받은 모든 농지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괴츠의 대가 없는 사랑은 사람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농지와 재산을 나눠 받은 가난한 이들은 그의 진심을 의심하며,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불안을 느낀다. 게다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그의 행보는 다른 영주들에게도 반감을 사게 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여기에 보름스의 봉기를 주도했던 나스티까지 등장해, 괴츠의 선택이 준비되지 않은 민중의 반란을 자극하고 수많은 희생을 초래할 것이라 경고하며, 결정을 번복하라고 압박한다. 그럼에도 괴츠는 흔들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견지해 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낡은 세계관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선’이란, 기도하고 면죄부를 사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괴츠가 마음을 얻고자 했던 이 사랑의 실천은, 그들에게는 닿지 못한 채 외면당하고 만다.


이때 하인리히가 등장한다. 그는 나스티에게 각 지역의 농민들이 곧 봉기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리고, 괴츠에게는 카트린이 곧 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나스티와 하인리히는 이런 농민들의 행동을 봉쇄하기 위해 모든 사제들을 숨어버리게 하는 계책을 쓰게 되는데, 신앙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많은 행동들을 정당화해 주고 죄를 사하여주는,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주민들은 겁을 먹고 모든 행동을 멈추고 교회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은 사제들이 다시 나타나 자신들을 인도해 주기를 바라며 무력감에 빠져든다.


2막의 끝, 결국 주민들은 이곳에서 괴츠를 새로운 인도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그 계기는 괴츠가 선의로 저지른 속임수에 기인한다. 괴츠는 이곳에서 고해신부를 애타게 찾으며 죽어가고 있는 카트린과 만나게 되는데, 애석하게도 모든 사제들이 숨어버린 탓에 고해신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그녀를 절망으로부터 구하고 편안하게 잠들게 해주고 싶었던 괴츠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그리스도의 상흔을 연기하기에 이르고, 이것을 본 카트린은 안도하며 눈을 감는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교회당의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 여기고 괴츠를 새로운 메시아로 여기며 따르게 된다.


3막에서 괴츠는 사람들을 모아 ‘태양의 마을’을 건설하고, 사랑을 통한 선의 실천을 유일한 교리로 삼는다. 그러나 그 안정은 얼마가지 못한다.

태양의 마을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란이 태동하고 있었는데, 봉기를 앞둔 농민 반란군에게는 괴츠의 뛰어난 군지휘력이 절실했다. 농민 반란군들은 그를 찾아와 장군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는데, 괴츠가 이것을 거부하자 앙심을 품은 농민군은 태양의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모두 학살해 버린다.

이 모습을 목도한 괴츠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참담함과 허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자신에 대한 응징을 위해 고행과 금식의 길을 택한다. 그로부터 6개월 후 폐인이 되어가던 괴츠의 앞에 하인리히가 나타나고 신학적 논쟁이 벌어진다.


괴츠 : … 대답은 없었어. 하늘은 내 이름조차 몰라. 나는 매 순간 신의 눈에 내가 어떤 존재일 수 있을까 자문했지. 이제는 내가 그 답을 알아. 아무것도 아닌 거야. 신에게는 내가 안 보여. 신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나를 알지도 못해. 우리 머리 위에 허공이 보여? 저게 신이야.

… 나 혼자 악을 결정했고, 내가 혼자서 선도 만들어 냈어. 속인 것도 나였고, 기적을 행한 것도 나였거, 오늘 나를 심판하는 것도 나야.

… 나, 인간인 내가 말이야.

[악마와 선한 신 中]


‘가슴을 찢는 만물의 부재’, 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괴츠는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모든 행위는 행위자인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으로서의 실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괴츠는 거듭된 패배에 사기가 꺾여 그 책임을 괴츠에게 돌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농민군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그는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참여하고 행동하는 실존적 존재로서 농민들의 개혁전쟁을 이끄는 장군으로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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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노력 없이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늘 가치 있는 그 무엇이 내게 오기를 열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한 노력의 품은 아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손쉽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 본능의 한 부분이기도 한 이 모습은 안타깝게도 현실의 그 속성과는 괴리가 있기에, 이 본능만 따르게 된다면 우리는 요행을 쫓는 삶의 행태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호기심을 갖고 지난함을 주는 그 무엇들에 의도적으로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다.

고전이라는 부담감,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보이는 스토리, 복잡한 철학적 요소, 장황하게 보이는 대사들의 나열. 결코 쉽게 시도할 만한 작품들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한 문장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이 독서의 시간은 기대이상의 가치를 안겨 주었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에 의해 규정되거나 자유를 제한받는 상황에 본능적인 반감을 느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려는 욕구는 인간 본성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통념에서 벗어날 때, 마치 무리를 잃은 철새처럼 깊은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종종 그러한 이탈자들이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배제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결국 다수의 기준 속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그렇게 우리는 ‘객관’이라는 이름의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지고, 자신의 의지와 다를지라도 ‘사회적 통념’ 속에 머물며 편안함을 찾으려 한다.


위의 두 작품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닫힌 방]에서는 ‘타인의 시선’, [악마와 선한 신]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인간 실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타인의 판단’과 ‘사회적 통념’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결국 개인의 자유와 존재를 억압하는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실천적 지혜를 찾아보기 위해, 두 작품의 결정적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닫힌 방]의 인물들은 그 억압의 구조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실존의 회복 가능성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반면 [악마와 선한 신]에서는 실패하고 고통받을지언정 스스로 선택을 통해 실존을 증명해 나갈 여지를 가진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삶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수십억 개의 답변이 있을 수 있고, 때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만난다면 그저 몸을 맡기는 것도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하지만 우리는 [닫힌 방]의 그들처럼 죽어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그저 자기 존재에 대한 정의를 사회적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에 의지한 채 살아서는 안된다. 사르트르가 이것을 ‘지옥’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조금만 상상해 보면 창의성과 변화력을 잃은 채 외력에 의해 사물화 되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을 잃고 무력감에 젖어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줄지어가는 인생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표류하지 않고 항해해야 한다.

실상 커다란 흐름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언정 최소한 내가 어디로 떠내가는지를 인식하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딪히고 깨지고 고통받더라도 스스로의 존재를 만들어가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악마와 선한 신]의 괴츠처럼, 그리고 어쩌면 파우스트나 돈 키호테처럼.


마지막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서양 철학 속에서 다시금 동양 사상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특히 [악마와 선한 신]에서 드러나는 선과 악의 상대성, ‘신은 무(無)다’라는 정의, 그리고 무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세계관은 노자의 도가사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사르트르가 실제로 동양 철학을 연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혹은 그가 직접적인 영향 없이도 시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비슷한 사유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유사성을 서로 전혀 다른 전통과 저작 속에서 마주하게 될 때, 독서의 즐거움은 한층 깊어진다. 이는 철학이 인간 보편의 사유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금 실감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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