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고.
N.H. 클라인바움이 각색한 340페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를 한 시간 반 만에 완독 하였다. 믿을 수 없는 몰입감으로 한번 앉은자리에서 모두 읽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고민의 지점이 많이 생겼다. 그 부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함께 생각해 보고자 이 글을 쓴다. 내가 10년 가까이 교육을 하면서 느꼈던 갈증, 답답함 그리고 고민과 두려움의 지점이 1990년대 초반에 쓰인 이 작품과 동일하다는 것에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사의 영향과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핵심은 닐의 자살이라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작가의 의도대로 어쩌면 무난하게, 조금은 자극적이게 16살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 욕망, 그러면서도 부모와 어른에게 쉽사리 반항하지 못하는 전통적인 청소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면 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기점으로 이 책은 청소년물에서 200% 극 사실주의로 변한다. 저자가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계를 보고 적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닐이 자택에서 자살한 뒤 학교는 그 책임을 존 키팅에게 찾으려 한다. 전통적인 명문 교육 방법에서 벗어난 수업을 하는 존 키팅에 대해 교장은 모든 책임을 씌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존 키팅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도 동참하는 자와, 동참하지 않는 자로 나뉜다.
최근 10년간 공교육은 붕괴되었다. 학교에서 교사는 정당한 생활지도 하나 조차 하지 못한다. 학생의 기분을 나쁘게 하면 '기분상해죄'로 아동학대로 고소를 당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어떤 열심과 의도를 가지고 수업 또는 교육활동을 하다가 학생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든 언론의 집중을 받고 교육청, 학부모, 경찰까지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기에 교사들은 매년 같은 내용만 반복해서 가르치는 기계식 수업을 하게 된다. 평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똑같이 안내하고, 똑같은 시험지에, 똑같은 조건에서 보는 시험이 공정하다는 헛된 환상에 사로잡힌 채 조금이라도 다르게 평가가 진행되는 것 같으면 공정성과 형평성이 위반되었다고 끊임없는 민원이 들어온다. 그렇기에 교사들은 존 키팅 같은 수업, 평가를 꿈꾸지만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나 역시 존 키팅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존 키팅이 잘못했네.'라는 생각과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존 키팅이 잘못했다는 측면에서는 교사의 영향력에 대해 논해야 한다. 교사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인생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는 존재이므로 섣불리 자신의 철학을 학생들에게 전파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신의 생각 없이, 자신의 인생을 부모의 뜻대로 살더라도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등급을 받아 아이비리그에 진출하고 의사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존 키팅의 말처럼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현세대의 교사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판단을 하는 순간 교사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그 책임은 오롯이 교사가 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존 키팅이 한 조금은 '다른 수업'과
닐의 죽음'이라는 단 두 가지 요소만 고려될 뿐, 학부모의 비겁한 양육태도나 닐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는 전혀 고려가 되고 있지 않다. 그저 학교에서 교육이 특이했고, 그래서 우리 아이가 죽었다는 단순한 명제가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교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너무나 논리적으로 빈약한 말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현재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민원이다. 학생이 잘못되었을 때, 다른 모든 가능성을 차치하고 오롯이 교사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진다. 이 얼마나 답답한 현실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자신의 교육적 신념을 수업과 평가로 구현해 낸 존 키팅은 잘못한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든다.
동시에 존 키팅이 책임을 지고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입장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논해야 한다. 교육을 하는 교사의 모든 행동에 대해 의도에 상관없이 존 키팅처럼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과연 교육이라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우린 생각해봐야 한다. 이 세상 그 누구든, 어떤 직업이든 당연히 자신이 하는 모든 말과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 책임이라는 것이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서, 공평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면 말은 달라진다. 고의적 혹은 미필적으로 큰 실수를 했거나 나의 행동으로 상대방의 큰 손해를 유발한 경우에는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교사가 말실수라도 학생들을 희롱하거나, 모욕감을 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존 키팅의 사례는 그것과는 다르다.
존 키팅은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생각하길 원했고, 자신에 대해 알길 원했다. 자신 안에 있는 욕구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일깨워주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성년자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닐이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본인이 부모에게 말을 하거나, 닐의 결정에 개입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닐에게 맡길 뿐이었다. 존 키팅이 추구했던 교육적 철학은 그 누구를 죽이려는 의도도, 손해 보게 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닐은 죽었다. 그리고 존 키팅은 학교를 떠났다. 닐을 죽인 교사가 되어서.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하면 기존 웰튼 아카데미의 전통적 철칙대로(혹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항상 해오던 방식대로만)만 교육을 했다면 카메룬의 대사처럼 닐은 죽지 않고 평범히 화학 수업을 듣고 의사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전통적인 방식대로만 수업을 해야만 '책임'이 지어지지 않는 것일까? 만약 어떤 학생이 전통적인 웰튼의 원칙대로 일방적이고, 폭압적인 교육을 받다가 똑같이 자살한다면 그때는 교사의 책임은 없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즉, 닐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변하지 않는 한 교사는 무조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불기인 것이다. 가정에서의 불화,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태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2. 교사로서 존 키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교사로서 존 키팅은 웰튼 아카데미의 이단아였다. 그는 누구보다 웰튼 아카데미의 철학과 시스템을 잘 알았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교사가 되어 다시 돌아온 그는 누구보다 웰튼의 시스템을 거부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내가 독자라는 입장을 버리고 웰튼 아카데미에서 존 키팅과 함께 근무하는 교사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 존 키팅의 존재가 '웰튼의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동료'가 될지, '제 잘난 맛에 기존 전통을 무시하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교사'가 될지를 정의하는 것은 곧 '나의 자존감'에 기인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 인물들의 대사로 미루어볼 때 등장한 동료교사들은 존 키팅의 교육철학과 방향에는 크게 동의하는 것처럼은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방향으로 함께 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나와있지 않으나 이 역시 오늘날 교단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므로 그 이유 역시 현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연구에 대한 보상체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교육의 시장화에 반대한다. 교육은 상품성이나 시장논리에 따라 운영될 수 없고, 운영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연구와 노력에 대한 투자와 보상이라는 개념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수업연구를 위해, 더 나은 평가를 하기 위해 연구하는 교사들에 대한 보상체계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에 대한 진심 때문에, 혹은 교사로서 수업 전문성을 신장시키고 싶은 마음에, 그저 매번 비슷한 교육활동을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 계발의 차원에서 오늘날 많은 교사들은 미미한 보상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연구회를 결성하여 자발적으로 연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돌아오는 학생들의 성장과 환한 웃음으로 그 보상을 대신한다. 이러한 희생과 순진성에 기반한 보상체계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많은 더 나은 수업평가에 대한 갈망과 시도는 뜻있는 몇몇에 의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 학교 전체가, 한 교육청 전체가 결집하여 추진하는 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도에 대한 보상은 매우 소중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지극히 감성적이고, 추상적이다. 물론 전문성을 쌓아 교수나 대학 출강을 나가는 현실적인 보상을 누리는 교사들도 소수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교사의 영역을 많은 부분에서 놓아야 얻을 수 있는 보상이므로 차치한다.
두 번째 이유는 새로운 시도를 했을 때 돌아오는 피해는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새로운 시도를 한 대가로 돌아오는 피해는 어떠한가? 한 교사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하고 현실적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민원. 그 민원에 대한 동료교사 또는 관리자의 질책. 그리고 그에 대한 교사의 소명 과정. 새로운 시도에 대한 이론적, 전문적 근거를 요구하는 목소리, 소설 속의 존 키팅에게 하듯 '너만 잘났냐'는 아니꼬운 시선. 100% 알고 있는 전문가도 아니면서 뭘 시도하냐는 완벽주의적인 충고들까지. 쉽게 말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온몸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10가지의 새로운 시도 중 9개가 성공하더라도 단 한 가지에서 민원 또는 실수가 발생한다면 그 시도 전체는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오늘날의 존 키팅들은 이러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만 존 키팅이 될 수 있었다. 소설 속의 존 키팅이 단 한 가지의 중대한 부정적인 결과로 인해 옷을 벗은 것처럼말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본질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나의 대답은 '변화할 수 있다.'이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함께'변화해야 한다.
작품 속 존 키팅은 본인의 교육철학이 매우 확고하고, 학생들과 라포도 잘 형성하고, 실력 있고 재치 있는 교사였지만 자신의 수업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학교의 리더십과 권위자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교육을 변화시키려는 교사는 '나의 철학이 확고한 만큼 상대방도 확고한 철학이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를 기반으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고, 기다려주고, 도움을 요청하고, 거절당하고, 다시 함께하기를 도전해야 한다. 존 키팅이 작품의 결말에서 오롯이 혼자 책임을 지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존 키팅의 철학에 동조하는 동료 교사들이 먼저 다가와 함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되면 좋은 옵션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 속 대한민국 교사들은 존 키팅보다 현명하다.
나는 대한민국 교사들이 그 어느 나라보다 역량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술한 여러 제약과 어려움 속에서도 수많은 연구회가, 수많은 교육청 연계 연구들이 실행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수업평가를 위해 '함께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현재보다 좀 더 거국적인 지원과 도움이 필요하다.
3. 학부모의 교육철학과 교사의 교육철학이 다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품 속 웰튼 아카데미의 학부모들은 전통적인 1등 위주의 성과 중심 교육의 중심인 명문 학교에 자녀를 보낸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존 키팅은 수업을 통해 학생의 사고력을 증진시키지만 성과를 단기간 내에 확인할 수 없는 교육이 학생을 주도성을 기른다는 교육적 신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은 현실 교육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교육주체의 철학과 관점이 상극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기간에, 나 혼자의 생각으로 단언하는 글을 쓸 수 없다. 이에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이 부분을 완성하려 한다.
당신의 생각을 제게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