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서

1590년 늦가을, 교토를 떠나 한양으로

by HistoryFile


1590년 늦가을, 교토를 떠나 한양으로


통신사 일행은 길고 지루했던 교토 체류를 마치고

귀국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때 일본 측이 마침내 히데요시의 답서를 내밀었다.


황윤길, 김성일, 허성 세 사람은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하며 조심스레 봉인을 풀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서라 함은,

외교의 정중함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펼쳐 든 답서의 문구를 읽어가기 시작한 순간,

세 사람의 얼굴빛이 급격히 굳어졌다.


'태양의 아들…이라 하였는가?'

황윤길의 목젖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랫줄을 훑던 허성의 손끝도 종이 모서리에서 멈췄다.

'명나라로 건너가 사백여 주를 정복하겠다니…'

천자를 넘보는 문장이 숨이 헐떡였다.


그러나 김성일의 눈길은 다른 구절에서 더욱 얼어붙었다.

전하(殿下)라 적혀야 할 자리에

신하의 호칭인 합하(閤下)가,

예물(禮物)이어야 할 것이

속국의 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이,

국빈의 내왕을 뜻하는 사행이 아니라,

황제 앞에 신하가 오르는 입조(入朝)가 적혀 있었다.


문장 속의 칼이 예의 옷을 입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 따위 서찰을 어떻게 가지고 돌아간단 말이오!”


김성일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하께 올리는 순간,

이는 나라 근본을 짓밟는 일과 다를 바 없소.

그 글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하오!”


황윤길은 이를 악물고 줄기를 다시 더듬었고,

허성은 이마를 짚었다.

방 안의 공기가 먹물처럼 눅눅해졌다.


일본 측 관리는 황급히 사과하는 듯 허리를 굽혔다.

글을 짓는 자의 실수라며,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곧 손질한 사본이 도착했다.

몇 글자, 전하와 예폐만 고쳐졌다.

그러나 문장의 뼈는 그대로였다.


귀국길. 포구의 나무 말뚝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고,

돛 줄은 팽팽해졌다.

배가 항구에서 몸을 떼자, 바다가 낮게 울었다.

양쪽 뱃전에서 바닷물 냄새와

화승의 탄내가 어렴풋이 섞였다.


김성일은 선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분노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속을 데웠다.

치욕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황윤길은 멀리 수평선을 보았다.

안개가 늘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웅크린 불빛이 깜박였다.

허성은 종이 다발을 품에 넣었다. 품이 묵직해졌다.


“돌아가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합니까.”


허성이 낮게 물었다.

한동안 누구도 답이 없었지만,

황윤길이 곧 짧게 답했다.


“문장의 겉과 속을 모두.”


그 짧은 말이 오늘의 모든 길이를 담고 있었다.

밤바다의 바람이 뺨을 스쳤다.

안개는 여전히 길을 가렸지만,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파도는 배 밑을 두드렸고,

배 위로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조차

전란의 북소리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의 결심이 조금씩 단단해졌다.

안갯속에서 맞닿은 수평선은 모호했고,

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불빛들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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