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 초겨울, 한양 경복궁
1590년 초겨울, 한양 경복궁
경복궁의 대전(大殿).
늦가을 찬 바람이 대궐 담장을 스치고 지나가며,
낙엽을 흩날렸다.
전각 내부에는 정적이 흘렀다.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국왕 선조 앞에 나란히 서서 하명을 기다렸다.
어좌 위의 선조는 두 사신을 번갈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들은 왜적의 형세를 직접 보고 돌아왔으니,
있는 그대로 아뢰도록 하라.
풍신수길이 어떠한 자이더냐?
그가 진정 우리 국경을 넘보려 하는가?”
정사 황윤길이 먼저 나섰다.
“전하,
풍신수길의 눈빛에는 반짝이는 기세가 있고,
그 기운은 이미 밖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머지않아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황윤길의 말에 대전 안이 술렁였다.
대신들 사이에 두려움이 번져가는 형세였다.
그러자 부사 김성일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신은 일본에서 그러한 징후를
뚜렷이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그저 족제비나 쥐와 같을 뿐,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되옵니다.
윤길의 말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조정의 인심을 불안케 할 뿐입니다.”
김성일이 황윤길의 말을 정면으로 막아서자,
신료들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때 유성룡이 나서서 김성일을 향해 직설했다.
“김공, 그대는 황공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고 있소.
만일 그대의 말이 틀려 정말로 병화가 닥쳐온다면,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할 셈이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대전 안을 묵직이 울렸다.
김성일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담담하게 받아 말했다.
“저 역시 왜적이 반드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사옵니다.
다만 전하와 신료들, 그리고 온 나라 백성들이
지나치게 불안에 휩싸이는 것을 우려하였을 뿐이옵니다.
작금의 사태를 결코 경솔히 다루려 한 것은 아니옵니다.”
김성일의 말은 온건했으나 유혹적이었다.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엇갈린 대신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풍신수길이 명을 침범하려 한다는 말이
이미 사방에 퍼졌습니다.
유구에도 소문이 났다 하지 않습니까?”
“허나, 일본이 대군을 일으킨다 해도
그들이 감히 명나라를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백성 수백 명이 투항하여
배를 만들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찌 허망한 소문이겠습니까?”
선조는 신하들의 격한 언쟁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결국 선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들의 말이 모두 일리 있다.
허나 지금은 명확한 증좌가 부족하니,
경솔히 병화를 운운하여
백성을 놀라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선은 침략의 징후가 없다는 부사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다.
다만 혹시 모를 일이니,
형편이 닿는 만큼 대비를 해나가도록 하라.”
황윤길은 절망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나직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한시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