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

1591년 초봄 남해안

by HistoryFile


1591년 초봄 남해안


날이 저물어가는 경상도의 들녘은

누렇게 바랜 하늘빛 아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은 매섭게 불어 흙먼지를 몰아쳤고,

그 먼지는 성벽 위로 스며들어

돌가루와 섞여 자욱한 연무처럼 피어올랐다.


곳곳에서 망치가 돌을 다듬는 날카로운 소리가

땡, 땡 울려 퍼졌고,

나무를 쪼개는 도끼질은 산허리까지 메아리쳤다.


그 사이로 군졸들의 훈련 구령이 호령처럼 울려 나와

성 안팎을 긴장으로 죄어왔다.


영천의 성곽 위에서는 흙먼지에 찌든 백성들이

삽을 휘둘러 성토를 쌓고 있었다.

땀에 젖어 옷자락이 몸에 달라붙었고,

손바닥은 굳은살과 피로 얼룩졌다.


그 곁에서는 유생들이 갓을 벗어 던진 채 돌을 날랐다.

글 읽는 손이 무거운 돌을 붙잡자,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혔다.


“책 읽는 서생들에게 이젠 돌까지 나르라 하네.”


한 유생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옆에서 함께 돌을 나르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가 위급하다지만, 이게 무슨 꼴이냐.

사족의 자제를 군졸처럼 부려 먹다니.

젠장할 노릇이지”


그러나 성 위에 서서 내려다보던 경상감사 김수는

조금도 지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거칠게 손을 휘젓고는 크게 외쳤다.


“지금은 붓보다 칼이, 글보다 성벽이 나라를 지킨다!

지금 힘들다 하나,

왜적이 쳐들어와 노비로 끌려가는 것보단 나을 터다!”


성벽 아래 모여든 사족들은 차갑게 눈을 흘겼다.


한편, 동래와 부산 방면에서는 더 큰 분주함이 이어졌다.

파도 소리가 쉴 새 없이 부서지는 해안에

새로운 만호진이 세워지고,

기존의 여섯 개 만호진이 옮겨져

바닷길을 더욱 촘촘히 막아섰다.


해안가 마을마다

짐승을 끄는 수레와 인부들이 몰려들어

목재와 돌을 실어 날랐다.


짐승의 콧김은 흰 연기처럼

차가운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고,

인부들의 신음도 그 속에 뒤섞여

한숨처럼 퍼져갔다.


돌더미를 어깨에 멘 사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성이 아무리 높아도, 배고프면 무슨 소용이 있나.”


옆에 있던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쌓아야지.

저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성조차 없으면 우리는 어디로 숨어.”


그러나 젊은 사내는 짜증 섞인 한숨만 길게 내뱉었다.


그들의 벌건 어깨 위에 얹힌 돌더미는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숨을 옥죄어 갔다.


바다를 지켜보던 한 늙은 어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대마도 왜구만 막으면 된다 하던 시절이 아닌 가베,

이제는 바다 건너 왜놈들이 죄다 몰려오려나 보지?

난리통이구먼 쯥..”


어부의 한숨도 바람에 실려 바다 위로 흩어졌다.

그 바다 너머 다가올 것들을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였다.




이전 09화언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