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30일 새벽 한양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30일 새벽 한양
밤은 길었다.
비는 처마 끝을 두드리다 말고,
다시 모여 한번 더 내렸다.
전날 밤, 궁문에는 자물쇠조차 채워지지 않았고
금루(金漏_물시계)는 시간을 고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호위가 다 흩어졌다”는 소식이
새벽빛보다 먼저 각 전각을 훑고 지나갔다.
새벽, 인정전 뜰이 인마(人馬)로 가득 메워졌다.
비는 처음엔 부슬부슬했으나 곧 장대했다.
말들의 콧김이 하얗게 떠올라 빗줄기에 부서졌다.
물먹은 깃발은 축 늘어졌다.
선조가 마루에 올랐다.
흰 비단 도포 자락이 비에 젖자,
얇은 손등의 힘줄이 더 도드라졌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빗줄기 사이로 모였다.
“떠난다.”
그 한마디 뒤, 숨소리와 비소리만 남았다.
말귀에 매달린 종이 가볍게 울렸고,
광해군이 아버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선조는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말들이 움직였고,
그 뒤를 이어 중전의 교자가 앞으로 나갔다.
비가 더 굵어지자, 가마꾼의 어깨가 휘청였다.
장대비를 뚫고 행렬이 서문을 향해 굽이 돌 때였다.
길이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혈관처럼 부풀어 올랐다.
젖은 베옷이 몸에 들러붙은 남녀노소가
칼끝처럼 빗발 사이에서 솟아났다.
맨 앞의 사내가 길 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전하—어디로 가시옵니까!”
울음이 먼저 터졌다.
그리고 곧 울음과 고함이 한꺼번에 섞여 튀었다.
아기를 품은 젊은 여인이
흙탕물 속에서 치마끈을 움켜쥔 채 엎어졌다.
“전하, 저 아이 아비는 남쪽 성에 남았사옵니다.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녀의 어깨가 비와 함께 덜덜 떨렸다.
나졸들이 비키라 소리쳤으나
그들의 창끝도 젖어 무더졌다.
말굽이 미끄러지며 흙이 튀었고,
말이 콧김을 내뿜자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분을 이기지 못해 진흙을 움켜 머리 위로 던졌다.
진창 덩어리가 행렬 안으로 휙 날아와 축, 하고 쳐졌다.
“우릴 버리고 어디로!”
고함이 터지자, 울음이 분노로 기세를 바꾸었다.
울음은 금세 함성으로 일렁거렸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한두 목이 외치자, 수십 목이 따라 물결쳤다.
잠깐, 군중의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부딪치면 터질 듯한 기세가 행렬을 덮었다.
그 때 말 한 필이 앞발을 번쩍 들었다.
광해군이 말 위에서 반 걸음 나아갔다.
그의 목소리가 비를 가르며 낮게 흘렀다.
“백성들이여, 길을 터주시오.
군사를 다시 모으고,
세를 규합하여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오늘의 떠남이 나라를 버림이 아니오.
끝내 그대들을 지키기 위함이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흔들리다가,
한 번 꺼졌다.
선조가 말에서 몸을 기울여 고개를 떨궜다.
비가 그의 얼굴을 타고 턱 끝에서 똑똑 떨어졌다.
“내 죄가 크다.”
짧았으나 무거운 한마디가 장대비 속을 비집고 나왔다.
사내가 천천히 엎드린 무릎을 일으켰다.
여인이 아이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누군가 울부짖으며 한 발 물러섰고,
또 다른 누군가가 아이의 젖은 이마를 쓰다듬었다.
길이 아주 조금, 물길처럼 비켜났다.
나졸들이 밀지 않아도
행렬이 좁은 틈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음은 쏟아졌으나,
길은 열렸다.
분노와 원망은 빗물과 함께 도랑으로 흘렀다.
행령은 재촉하며 길을 이어갔다.
홍제원에 닿을 즈음,
교자의 덮개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북채처럼 위태롭게 울렸다.
가마꾼의 발이 거듭거듭 미끌렸다.
시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마, 말을 타시렵니까.”
중전은 잠시 답을 못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교자가 멈추고, 말이 왔다.
치맛자락 아래로 흙탕물이 튀어 올랐다.
뒤따르는 시녀의 신 사이로
진흙과 빗물이 계속 메워져 들어왔다.
발가락 사이로 냉기가 파고들었다.
울음이 목울대에 차올랐지만, 이를 꽉 깨물었다.
누군가의 울음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와
길섶의 풀잎처럼 길 위에 흩어졌다.
종친과 호종하는 신료는
헤아려 보아도 백 명이 차지 않았다.
정오 무렵 벽제관에서 급히 점심을 들었다.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갖춰졌으나,
동궁 앞 그릇은 반찬이 비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은 진흙탕을 이리저리 뛰었지만
손쓸 길이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은 채
눈만 커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비는 그 사이에도 줄지 않았다.
해가 기울며 하늘은 잿빛에서 먹빛으로 번졌다.
일행이 임진강 나루에 닿았을 때,
물비린내와 젖은 갈대 냄새가 확 올라왔다.
나룻배가 어둠 속에서 낮게 몸을 뒤척거렸다.
선조는 배에 오르기 전
잠시 멈춰 호종하는 신하들과 궁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장대비에 씻겨 더 맑게 떨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몸을 굽혀 땅에 이마를 찧었다.
그리고는 오래 울었다.
좌우의 사람들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따라 울었다.
호곡(號哭)이 시작되자,
다른 소리들이 뒤엉켰다.
빗소리, 말 울음, 젖은 신발이 진창에서 빠져나오는 척척 소리.
사관은 흙물 튀는 종이를 품에 안고,
떨리는 손으로 단 한 줄을 더 적었다.
‘군신이 통곡하였다.’
그 한 줄에 세상만큼의 울음이 들러붙었다.
등불 하나 없는 어둠,
바람만 물결을 더듬었고, 배가 강 위로 미끄러졌다.
가장 앞선 사공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이 물살이면… 밤이 깊어야 다 건너겠습니다.”
강물은 검고 무거웠다.
선조는 물결의 검푸른 비늘을 바라보다
등을 펴고 고쳐 앉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간신히 동파(東坡)에 닿았다.
식량은 모자랐고, 사람은 더 모자랐다.
굶주리고 지친 백관들은
강가 촌가로 흩어져 쓰러지듯 누웠다.
젖은 옷자락이 살갗에 달라붙어 비늘처럼 차가웠다.
아직 물에 막혀 건너지 못한 이가 절반을 넘었다.
깜박이는 불빛 하나 없이,
강만 검게 계속 흘렀다.
그 날, 길은 물에 잠기고,
군신은 눈물에 젖었다.
떠남은 벌써 시작되었지만,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돌아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