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5월 초 어느 날 오사카성
1592년 임진년 음력 5월 초 어느 날 오사카성
비가 막 그친 뒤,
정청의 창문살에 붙은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은빛 구슬처럼 떨었다.
문지방을 넘어 달려든 급보가
두루마리 째 탁상 위로 펼쳐졌다.
히데요시의 부관이 무릎을 꿇고
두루마리를 펼쳐 첫 문장을 읊었다.
“한양 함락. 개전 보름 만이라 하옵니다.”
히데요시의 부채가 허공에서 한 번 멈췄다.
바로 얄팍한 미소가 입가에 얹혔다.
부채 끝이 조선 지도 위 붉은 선을 따라,
부산에서 한양으로 곧게 그어졌다.
“十五日(십오일)...”
그는 낮게 되뇌었다.
“좋다. 머리를 눌러 잡았으니
팔다리는 금세 오그라들겠지.
길 위의 쌀자루도, 화약도 이제 가벼워질 터...”
그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부관이 다음 문장을 훑었다.
“—조선 왕, 관서로 파천.”
글자를 읽던 관리의 목소리가 잠깐 흔들렸다.
“의주 방면이라 합니다.”
정청의 공기가 한 치 식었다.
히데요시의 미소가 미약하게 접혔다.
부채 등받이에 새겨진 비늘무늬를 엄지로 누르며
그가 되물었다.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예, 전하.”
“주군이 성을 버리면 땅이 저절로 따라 눕는 법...”
히데요시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흥미 사이 어딘가였다.
“척후에 의하면 충청의 고개마다 목책이 오르고 있고,
호남의 고을들은 군량을 숨기며 길을 닫고 있다 합니다.”
장개의 문장이 끝을 맺자 히데요시의 눈썹이 움찍거렸다.
“붉은 선을 잇고 점을 찍으면,
면이 붉어지는 그런 싸움이 아니라는 건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부채 끝이 지도의 한양에서 북서쪽으로,
강굽이와 산맥을 따라 다시 흘러갔다.
이윽고 히데요시가 부채를 탁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왕을 쫒아라!”
필방에서 먹을 갈던 서리들이 일제히 붓을 들었다.
주인장(朱印状_명령서)을 쓸 명목들이 줄줄이 구술되었다.
“대마도의 종의지(宗義智_대마도주)에게 전하라.
통역을 더 붙이고, 왕의 거처를 찾아내 고하게 하라.”
“고니시에게는 강줄기를 타는 추격로를 택하라 전하라.
임진의 나루마다 배를 묶어 두고,
건너는 자는 막고, 돌아오는 자는 살펴라.”
“가토에는 산줄기 우회로를 맡겨라.
동쪽의 길은 거칠지만 빠르다.”
주인(朱印)이 끓는 듯 붉었다.
큰 인장을 들어 꾹 눌러 찍을 때마다,
종이 밑으로 탁상의 나뭇결이 올랐다.
그때, 조용히 옆으로 물러서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한양은 빼앗겼으되,
조선 백성들의 마음은 아직 조정 곁에 있는 듯 하니,
왕이 떠났다고 땅이 저절로 눕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골짜기와 산등을 가볍게 눌렀다.
“그리된다면 산마다 불씨가 있을 것입니다.
보급로가 길어져 길 하나가 끊기면,
물자와 군사는 바다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이번에는 전라(全羅)의 땅을 손으로 덮었다.
“승리는 빠를수록 값이 싸지만,
느려지면 값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적의 곡창을 빼앗아 만일에 대비하소서”
미쓰나리가 말을 끝내자
히데요시의 눈이 가늘게 번뜩였다.
정청 바깥에서 북채 소리가 울렸다.
전령들이 고삐를 조이며 말을 돌렸다.
항해장(航海長)은 도착하는 명부를 받아들여,
배에 실을 쌀자루와 화약상자를 다시 배치했다.
통역으로 차출된 자들에게 얇은 목도리가 나눠졌다.
천이 목을 감싸며, 그들의 어깨가 조금 덜 떨렸다.
명들이 연이어 완성되었다.
‘강 건널 줄. 나루 방비.
각 성의 인부와 목재 징발.
통역 배속.
포로 심문 항목.’
글자 옆에는 작은 점이 찍혔다.
그 점들은 조그맣고도 매서운 별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
방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히데요시는 홀로 남아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창밖으로, 비에 씻긴 하늘이 얇게 열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지도 위를 맴돌았다.
조선의 강과 산, 바다 하나하나가
생경하게 또렷해지는 듯했다.
그는 속으로만 말했다.
‘왕이 도망친 전쟁...
다만 그 왕이 돌아올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건가?’
주군이 떠난 자리에는 곧 어김없이 침묵이 깔렸었다.
칼날은 종종 그 목으로 되돌아갔고,
그것이 끝이었다.
적어도 그가 지나온 길 위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지도 위의 나라에서는,
왕이 떠났어도 왕을 향한 길이 남아 있는 듯했다.
다른 이가 그 길을 몸으로 메운다면,
이 전쟁은 칼끝이 끝내 닿지 않는 곳에서
더 길게 타오를지도 모른다.
그는 부채를 반쯤 접은 채 창밖을 보았다.
비는 거의 그친 듯했으나,
처마 끝에서 마지막 몇 방울이 오래 느리게 떨어졌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그의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
낯선 관습과 낯선 충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끊고 나가야 하는 자신의 전쟁.
히데요시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끝. 아직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