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5월 7일 옥포
1592년 임진년 음력 5월 7일 옥포
새벽녘 옥포 포구에 안개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돛줄에서 밤새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선창 바닥에 퍼진 송진 냄새가 축축한 공기에 눌려 낮게 깔렸다.
일본 수군은 닻을 내리고
포구 민가에서 털어온 물건들을 헤아리고 있었다.
발판 위에서 졸던 사수가 하품을 삼킬 때였다.
하늘이 먼저 찢어졌다.
어디선가—눈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저쪽 섬마루 너머에서—불빛이 솟구쳐 올랐다.
깃털 달린 듯 가늘고 길게 하늘을 그은 불화살들이
새벽빛과 겹치며 꼿꼿이 날아올랐다가,
바람의 골을 타고 사선으로 꺾이며 꺼졌다.
곧이어 먼 곳에서 늦게 따라오는
울음 같은 소리가 귀를 스쳤다.
불빛은 또 올랐다.
네 개, 다섯 개.
“신호용 화전인가?”
옆의 사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조선 왕도 도망친 마당에...”
“우리가 왔다고 도망치라는 신호쯤 될려나?”
병사들의 눈빛이 조금 불안해지긴 했지만
곧 다시 무신경해졌다.
해가 떠올라 포구의 물결이 황금 비늘을 드러낼 때까지,
그렇게 한동안 불빛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노끈을 가다듬고,
밥을 데우고,
쇠부싯돌을 닦는 소리로 오전이 흘렀다.
정오쯤이 되었을 때 먼저 파도결이 틀어졌다.
햇빛이 바다를 빗질하듯 쓸고 가는 사이,
해안 밖 물목의 밝기가 기묘하게 가라앉았다.
곧이어 동쪽에서 높다란 배의 옆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처럼 층을 이룬 뱃전,
네모난 포문들이 줄지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서쪽에서도 같은 그림자가 솟았다.
북소리는 없었다.
오히려 모든 북이 입을 다문 듯했다.
그 침묵이 곧 적들을 덮었다.
그리고는 물의 문이 고요히 닫혔다.
포구는 한순간에 솥이 되었다.
“조...선 수군!”
깃대 위 신호기가 떨렸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북소리도, 함성도 없었다.
오직 깊고 두터운 침묵이 먼저 밀려왔다.
그 침묵 속에서 선두의 여섯 척이 달려들었다.
하늘을 등진 검은 덩치들이 가까워질수록,
포문이 눈동자처럼 커졌다.
순간 하얀 연기가 포문에서 입을 벌리고,
천둥이 등뼈를 때렸다.
"콰광! 콰광!"
일본의 배 옆구리가 종잇장처럼 찢기며
널빤지와 살점과 피가 한꺼번에 흩어졌다.
곧바로 냄새가 머리를 덮었다—
송진, 화약, 피, 젖은 나무가 섞인 뜨거운 매캐함이
단번에 목구멍을 막았다.
“닻을 올려! 줄을 끊어!”
외침들이 줄에 엉겨 붙었다.
칼이 닻줄을 베어내는 동안,
서쪽 입구에서 또 한 번 포성이 겹쳤다.
"콰광! 콰광!"
사방의 것들이 찢겨 오르며 비명이 터졌다.
동서가 동시에 닫혔다.
솥뚜껑이 이미 얹혀 있는 형세였다.
여섯 척이 포문을 번갈아 토해내며
길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뒤로 전 조선 함대가 물결의 리듬처럼
포격을 이어 붙였다.
소리의 물결이 겹치며 허파를 뒤집었다.
선창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미끄러졌다 서로 붙들렸다.
일본군의 포는 낮았고,
조총은 하늘을 긁었다.
화살은 상대의 높은 난간에 닿기도 전에
연기 속에 먹혔다.
갈고리줄을 던진 무사가 있었으나,
줄이 팽팽해지기도 전에 포문이 터지며
공중으로 떠올라 물속으로 처박혔다.
가까이 있던 상관의 가면 같은 얼굴이 산산이 흩어지며
병졸들의 뺨에 뜨겁게 뿌려졌다.
귀가 멀었다 돌아왔다.
불은 빠르게 배를 먹었다.
돛대 끝의 깃발이 소리 없이 검게 오그라들었다.
“노를! 노를 밀어!”
가는 줄 같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노는 손에서 계속 미끌렸고,
바다는 갑자기 뻘처럼 무거워졌다.
바깥으로 튀어나가려 덤빈 몇 척이
동쪽 물목으로 쇄도했으나,
그 위로 포탄이 비처럼 떨어졌다.
한 척이 뱃머리째 뒤집혔고,
쏟아진 사람들의 등이 번쩍하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조선군의 질서가 매서웠다.
그들의 움직임은 새벽의 신호 불처럼 간결했다.
선두 여섯이 먼저 물문을 뚫고,
뒤따르는 배들이 맥박처럼 간격을 맞춰 포를 토했다.
북은 보이지 않았으나,
포성이 북이 되어 적의 가슴뼈를 두드렸다.
그 맥박은 살아 있는 듯 뛰었고,
그 생동은 적의 죽음을 불러냈다.
몇몇이 끝내 닻줄을 끊었다.
배가 비명을 삼키듯 짧게 떨더니 몸을 비틀었다.
일본군은 사력을 다해 가장 얕은 쪽으로 배를 밀어붙였다.
밑창이 모래를 긁으며 멎자,
적장은 칼을 던지고 외쳤다.
“내려! 산으로!”
사람들은 칼도 조총도 벗어던지고,
저마다의 생명을 들쳐 업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포문이 또 번쩍—배의 속살이 열리고,
불빛이 배의 심장을 훑었다.
그 불빛 속에서,
조선의 궁수 하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활을 당겨 붙였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바다는 귀를 막고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았다.
모래사장 위로 기어오른 이들이 숨을 토했다.
산새 떼가 놀라 숲을 떠났다.
아래로 내려다본 포구는 거대한 화로였다.
검은 연기 아래로 붉은 불빛이 들쑥이며,
물 위에 떠 있던 등들이 하나둘 뒤집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살아서 빠져나온 배는 몇 척뿐,
배를 타지 못한 이들은 산길로 흩어졌다.
저문 하늘 아래,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고요해졌다.
하지만 포구의 물은 오래도록 심장처럼 뛰었다.
그 뛰는 소리 사이로,
멀리 새벽의 불빛이 다시 한번 하늘에 궤적을 그었다.
바다는 이제 시작이었다.
끝은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