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3일 새벽 부산진성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3일 새벽 부산진성
바다는 아직 안개에 싸여 있었다.
새벽빛이 비늘처럼 뜯겨 나가며 부산 앞바다에 흩어졌다.
부산 앞바다는 이른 시각부터
기묘한 물결에 뒤흔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먹구름 같은 그림자가
서서히 몸집을 키우며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백 척의 왜선(倭船)이었다.
먼저 검은 돛 줄이 안개를 찢었고,
이어 깃발의 색이 살아났다—붉은 깃발, 흰 깃발.
일사불란하게 파도를 가르는 선단은,
잠든 부산진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다가왔다.
배마다 칼과 조총, 장창을 든 병사들이 가득 실려 있었고,
진격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안개를 뚫고 울려 퍼졌다.
부산진성의 성루에 서 있던 장수 정발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규모였다.
수만의 병력이 실린 선단이 한꺼번에 부산 앞바다를 메우자,
마치 바다가 살아 움직이는 듯 거대한 검은 물결로 변했다.
그때, 왜선 하나가 앞으로 나오더니
흰 깃발이 성벽을 향해 높이 들렸다.
왜군 사자의 목소리가 파도를 타고 성안으로 스며들었다.
“조선의 장수여! 성문을 열라.
항복하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말뜻이 전해지자,
성안에 긴 한숨이 터졌다.
누군가는 병장기 위에서 떨리는 손을 감싸 쥐었고,
누군가는 애써 태연한 척 파래진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움이 성벽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순간, 성루 위에 정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옻칠한 검붉은 갑옷 위로 아침 빛이 번쩍였고,
그의 눈동자는 바다의 칠흑처럼 깊고 매서웠다.
그는 성루 끝으로 나아가 외쳤다.
“도적의 말 따위 들을 가치도 없다!
이 성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의 무덤이 될지언정,
결코 너희 손에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자가 어찌 목숨을 탐하겠는가!”
그 울림은 돌벽을 타고 성안에 울려 퍼졌다.
왜선 위의 사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무심히 깃발을 거두었다.
흰 깃발이 물러나자,
바다는 다시 철로를 달리는 듯 북소리로 뒤흔들렸다.
성 위에 서 있던 정발이 몸을 돌려 병사들을 응시했다.
이미 젖은 갑옷, 떨리는 손, 마른침 삼키는 소리...
그 때 그의 장검이 하늘을 갈랐다.
“모두 들으라!”
사방의 눈이 정발에게 꽂힌다.
“방금 저들이 말한 것은 거짓 평안이다.
이 성은 우리 피로 쌓여있다.
물러서는 자는 살아도 만대의 치욕 속에 죽을 것이다.”
정발은 다시 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적은 많다. 허나 내 옆에 선 자, 내 뒤에 선 자—
모두가 나의 방패요 칼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다.
이 땅의 선령들이 우리를 지켜볼 것이다.”
정발이 말을 맺자,
군졸들의 가슴 속 기개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활을 움켜쥔 손이 다시 팽팽해졌고,
창 끝이 바른 방향을 찾았다.
허리끈을 다시 묶는 소리,
갑옷의 고리들이 맞물리는 소리,
북을 찾는 손이 가죽을 두드려보는 소리,
수많은 소리들이 모여
전의가 깃발처럼 꿋꿋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날이 점점 밝아오고,
일본군의 함성이 바다를 뒤흔들며 퍼졌다.
배들이 일제히 해안에 닿자,
전열 정연한 병사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에 투구를 쓰고,
길고 날카로운 창과 조총을 든 병사들이
줄지어 해안에 정열 했다.
이어 북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는 듯한 발소리가
성을 향해 다가왔다.
왜군들은 일제히 부산진성을 포위했다.
도열한 일본 병사들의 투구가 서늘하게 번뜩였고,
성안의 눈빛도 맞서 부딪치듯 불을 품고 이글거렸다.
각 군영의 북소리와 함성이 뒤엉키며 곧 닥칠 전투의 기운이 부산진성을 뜨겁게 달궜다.
부산 앞바다는 더 이상 고요한 항구가 아니었다.
이제 그곳은 피로 얼룩질 거대 전쟁의
첫 장이 펼쳐질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