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1585년 여름, 교토의 궁정
시간을 거슬러 1585년 여름, 교토의 궁정
저녁 불빛이 주렴을 타고 번져 전각 마루를 금빛으로 적셨다.
새로이 관백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비단 옷자락을 끌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발끝이 닿을 때마다
겉옷에 수 놓인 용문이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가 서는 자리마다 침묵이 먼저 엎드렸다.
가신들은 숨을 죽인 채 엎드려 그의 한마디를 기다렸다.
전각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히데요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에야스, 붓을 들어 내 말을 글로 쓰라”
먹을 갓 갈아 올린 붓끝에서 잔향처럼 먹향이 번졌다.
“나는 명을 정벌할 것이다.”
붓이 종이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서걱였다.
먹향은 금세 종이 깊숙이 파고들어,
마치 피로 새긴 듯 무겁게 늘어앉았다.
“머지않아 여름은 한양에서,
겨울은 북경에서 보내게 되리라!”
차갑게 입꼬리를 올린 그의 얼굴이 불빛에 번들거렸다.
오래도록 싸워온 자만이 지닌 해골 같은 설득력
—그것이 히데요시의 혀끝에 붙어 있었다.
새로운 전공과 포상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기뻤다.
바다의 파도와 낯선 언어, 끝없이 이어질 병참,
그리고 곧 따라서 이어질 죽음들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두려웠다.
등잔불은 그들의 속내를 읽지 못한 듯
오직 기름 냄새만 키워 갔다.
연회를 파하고 불빛이 낮아지자,
히데요시는 홀로 정원에 섰다.
여름밤 향내가 스치고 문득 불타 무너진 성루처럼,
기억 속에 비스듬히 서 있는 노부나가가 떠올랐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달의 윤곽을 오래 바라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달빛 아래,
그의 눈앞에는 이미 거대한 함선의 돛과
수많은 병사의 투구들이 검붉게 일렁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조선을 넘어
북경의 성루 위로 뻗어 있었고,
하늘 아래 모든 천하가 그의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업을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달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발자국 하나를 뗄 때마다,
먼지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전쟁의 연기처럼
그 뒤를 따라붙었다.
달빛이 더욱 또렷이 그를 비추고,
바람은 정원의 대나무를 흔들며 스산한 울림을 퍼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