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과 능금마을
▲ 사과 능금은 아니다. 홍로라는 종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했다. 2012년 경남 거창에서 촬형한 사진이다.
ⓒ 곽동운
창의문 밖인 백사실 계곡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필자와 함께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한 참가자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능금마을 백사실 계곡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 곽동운
1396년(태조5)에 세워진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의 하나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 고개에 서 있다. 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두 산을 거느리고 있는 창의문의 지형적 존재감을 더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인왕산을 타고 내려온 서울성곽이 북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었던 숙정문이 근방에 있었음에도 소문(小門)이었던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숙정문을 이용하려면 북악산의 급격한 경사를 타고 가야 했기에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1413년(태종14)에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로 문이 닫히게 됐는데 숙정문이 오른쪽 어깨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어깨로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능금마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북악산 뒤편이다.
ⓒ 곽동운
오른쪽 어깨가 있으면 왼쪽 어깨도 있을 것이다. 그 왼쪽 어깨 역할을 창의문이 했다하여 1413년에 창의문도 함께 폐쇄가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하여 도성에서 북쪽 지역인 개성이나 양주로 가는 길이 오랫동안 불편을 겪게 된다. 창의문은 폐쇄된 지 거의 100년이 흐른 후인 1506(중종1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문이 열리니 길도 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역사적인 발자국도 하나씩 하나씩 생기게 됐다. 인조반정도 그런 역사적인 발걸음 중에 하나다. 1623년 3월 13일,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창의문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
ⓒ 곽동운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창의문은 사대사소(四大四小)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가진 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금의 문루는 영조 17년에(1740) 세워졌지만 1396년에 세워진 '동기동창'인 나머지 사대사소문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거되거나 그 원형이 훼손됐기에 창의문이 '최고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재 전까지 숭례문이 그 '최고참' 자리에 있었다.
그 많던 부암동 일대의 사과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을이면 경림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그 많던 상인들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능금나무가 심어져 있던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상인들을 대신해서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역사적인 해석도 변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군이 '의군'인지 아닌지,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 그런 역사적인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변하지 말고 계속 그대로 존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들이 있어야 역사탐방을 하든 역사트레킹을 하든 할 테니까. 어찌됐든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7년 만에 창의문 옛길이 복원된다는 소식이 정말 반갑다. 180미터 복원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원형을 찾아가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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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