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였다. 이사 온 동네 풍경에서 가장 적응이 안 된 부분은.
삼십 년이 넘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내게, 동네 나무는 언제나 거대한 존재였다. 12층에서도 창을 심히 가린다는 민원이 들어와 윗가지를 자르고 잘라도 성큼 자라버리는, 생명력이 왕성한 나무말이다.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는 나의 등하굣길에 송충이들을 툭툭 떨어트리기도 했지만, 툭툭 떨어지는 빗줄기들을 막아주기도 했다. 커다란 크레인이 와서 가로수 나뭇가지들을 무섭게 잘라내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또 무성해졌다. 덕분에 폭염에도 우리 동네엔 시원한 녹음이 깔렸다.
그 뒤 이사를 간 동네들도 구축 아파트라 나는 늘 커다란 나무들과 살았다. 그런데 최근 이사 온 동네는 나무가 영 어리고 부실했다. 비용 때문인지 어리고 약한 나무를 심어 놓은듯했다. 지하철역 방향으로 주욱 서 있는 가로수는 가느다란 가지마저 짧게 쳐놔서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봄이 되자 그 앙상한 나무 무리에 꽃이 폈다. 벚꽃이었다. 활짝 펼쳐진 부채처럼 분홍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이 아니라, 가지를 다 짧게 잘라놓아 딸기우유 맛 크런키 빼빼로처럼 삐죽삐죽한 벚나무들이 길가에 가득했다. 세상에, 무슨 벚꽃이 저렇담?
길을 다닐 때마다 초현실주의 회화 같은 그 풍경이 몹시 신경이 쓰였고 도대체 가지치기를 왜 저렇게 한 것인지 궁금했다. 지역 커뮤니티에 질문을 올렸다. ‘우리 동네 나무들은 왜 그렇게 가지치기를 과하게 하나요?’ 나무가 가늘고 약하면 가지를 다 잘라줘야 한다는 답이 달렸다. 그렇게 해야 영양이 몸통으로 가나 보다.
아, 당장은 미워 보여도 더 많은 꽃을 피우려면 저 정도로 잘라내야 하는구나. 나무를 못나게 여겼던 일이 미안했다.
올봄도 우리 동네 벚꽃은 여전히 딸기우유 빼빼로다. 하지만 더 이상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더 굵어지고, 더 무성해지기 위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를, 단지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바라본 적은 없었을까? 이미 벚나무를 가는 눈으로 바라본 전적이 있으니, 아닐 거라고 선뜻 답하진 못하겠다. 어쩌면 동네 나무가 자꾸 눈에 걸린 것은,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과감히 더 잘라내야겠다. 우스꽝스럽더라도 눈치 보지 말고.
이 글을 쓰고 5년이 지난 오늘, 도서관 책 모임에서 만난 동네 친구가 단체 카톡창에 밤 산책 중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토끼 벚꽃’을 찾아보라는 퀴즈였다. 또 다른 동네 친구가 답을 맞혔다. 양 갈래로 삐죽이 선 벚꽃이 친구의 눈에는 귀여운 토끼로 보였다니! 역시, 동네 나무가 자꾸 눈에 걸린 것은,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친구 덕에 나는 봄마다 그 나무에서 분홍 토끼를 떠올릴 것이다. 이 토끼가 5년 뒤, 10년 뒤 누군가의 눈엔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벌써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