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

[인도에 산다 #05] 살아남기 위해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by 백두산


중학교에 진학한 후, 식사를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배가 슬슬 아프고, 속 쓰림 증상이 있었다. 통증이 심하지 않고 조금 참고 나면 괜찮아졌기에 꽤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통증과 속 쓰림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증상의 빈도가 잦아져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신경성 위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 이후로 잊을만하면 속이 쓰리고, (복부) 통증을 느꼈다.




LPG-gas-Cylinder.jpg 가스통을 배달해 주는 청년


인도에 처음 도착한 후 집을 구하고 가스를 주문해서 가스레인지를 사용할 수 있기 전까지는 주로 밖에서 음식을 사 먹었다. 인도에서는 집집마다 가스를 주문해서 사용하는데, 가스 회사에 가스를 주문하면 가스통을 집으로 배달해준다. 이것 또한 제때 배달이 오지 않을 때가 많아서 현지 사람들은 가스 회사에 가서 두 통을 사서 직접 들고 오기도 한다. 그래서 보통 가스통에 남은 가스 양을 확인하고 보름 전쯤에 주문을 넣어놓는다. 인도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인도 음식은 꽤 맛이 있다. 아니, 상당히 맛있다. 하지만 맛있는 것도, 하루 이틀 나흘 열흘 먹다 보면 물리기 마련이다. 음식점에서 사 먹는 음식은 가정집에서 하는 음식과는 다르기도 하고, 더군다나 인도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나에게는 매일 먹기에 무리가 있었다.



photo-1536305030588-45dc07a2a372.jpg 인도에 흔한 음식들의 모습


밖에서 음식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상 징후가 느껴졌다. 첫째로 소화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고 몸이 무거움을 느꼈다. 둘째로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셋째로 피부 가려움증이 때때로 일어났다. 한동안 이런 증상들이 지속되다가 급기야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끙끙 앓았다. 타국에서 몸이 아플 때만큼 서러울 때도 없다. 그러다 더 이상 혼자 버티기 어려워 한국인 선배에게 연락해 학교 병원에 갔다(이곳에는 이미 아유르베다를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선배들이 세 명이나 있었다). 이전에 얘기한 것처럼 내가 다니는 학교에 (아유르베다) 병원이 함께 있다. 우리 학교 병원은 환자들에게 무료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일종의 의료 복지인 셈이다. 인도에 있는 국공립 대학교 (아유르베다) 병원은 대부분 무료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나라(혹은 주)에서 약재나 의료인력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 또한 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왔다.




처음 아유르베다 병원에 가면 약간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바로 약을 먹는 방법이 굉장히 까다롭다는 점이다. 내 경우에는 몇 가지 가루약을 받았다. 이중에는 물에 넣고 약한 불에 끓여서 반으로 줄여 아침 식후, 저녁 식전에 마셔야 했다. 다른 가루약은 꿀과 기(Ghee)를 넣고 섞어서 조금씩 빨아먹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떤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묻고, 묻고, 또 물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알약 몇 알 먹으면 되는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까다로운 일이다. 그래도 효과가 좋아서 며칠 뒤에는 기운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주일 가량 앓고 나니 살이 많이 빠졌다. (인도에서 처음 1년을 지내며 살이 10 킬로 정도 빠졌고, 그 몸무게를 계속 유지 중이다.)




인도에 오면 대부분 누구나 적어도 한 차례는 신고식(?)을 치른다. 음식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고,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에 와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밖에서 음식을 사 먹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인도에는 물에 석회질 성분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냥 수돗물을 끓이면 냄비에 하얗게 부분 부분 일어난다. 그러니 절대 수돗물을 마시면 안 된다. 꼭 정수된 물을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밤새 설사를 하며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photo-1556047545-17fe70655b8c.jpg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깟 나무를 오르지 못하랴

한 차례 호되게 앓고 난 후, 요리를 해 먹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인터넷을 뒤져서 레시피를 찾고, 올 때 가져온 된장 고추장을 활용해 이름 모를 음식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타협을 봤을 나지만, 이곳에서 요리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침-점심-저녁을 만드는데 매번 최소 한 시간에서 세 시간까지 소요됐다. 하루 세 끼 챙겨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세상에 모든 어머니들에게 새삼 존경심이 느껴졌다. 요리, 빨래, 청소.. 하고자 하면 하루 종일 해도 끝이 없다. 반면에, 일한 태가 나지 않는다. 가정에서 집안일을 하는 이에게 “집에서 하는 일이 없다”는 식의 말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아무리 잘해도 태가 나지 않는 게 집안일이다. 제대로 일주일만 해보면 알 수 있다. 왜 ‘가사 노동’이라고 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이후로 쭉.. 깨닫는 중이다.




구자라트주에 잠나가르라는 인도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나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고립감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비단 인도에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국에 있을 때도, 나는 자주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그 느낌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부단히 노력했었다. 그런데 이런 낯선 땅에 혼자 덩그러니 있자니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무치게 외롭다는 말을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인도에서 총 7년 정도 되는 시간을 보내며, 처음 3년 넘는 기간이 그랬다. 고립감과 외로움과 공허함의 밀도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 중에 가장 높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럴 때면 속으로 되뇌던 말이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인데, 이것은 류시화 작가가 엮은 시집에서 읽은 것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집인데, 나는 이 시집이 너무 좋아서 어딘가를 떠날 때면 항상 함께 챙겼다. 힘들 때면 펴서 읽고 또 읽으며 위안을 많이 받았다. 괴로움의 무게가 증가할 때마다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되뇌곤 했다. 만약 내가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버린다면 너무 절망적이어서 삶에 대한 기대와 기쁨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다행이었던 사실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형이 있었고, 좋은 선배들이 있었고, 나이는 엄마와 비슷했지만 정말 좋은 친구가 되어준 같은 반 독일인 친구도 있었다. 너무 힘이 들면 찾아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오며 많은 것들을 살필 수 있었고 명료하지 않은 문제들에 마주하며 분명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소중한 배움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정말 소중한 동료들과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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