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
지훈
결국 휴가를 내고 말았다. 이런 정신상태로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오늘 조정 자리에 가는 것도 생각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다. 법치사회 법치 사회하는데 대체 법치사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정말 법이 있다면 화끈하게 피해자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한국에서는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보다 고통받는 듯한 느낌이다. 정상이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 판사, 검사, 변호사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다.
"법원을 다 와보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지만 나 같은 사람을 또 만들고 싶지 않은 생각에 발길을 한다. 몇 호인가? 628호로 가면 되는데 신분증까지 맡겨야 한다. 법조인들에 대한 테러 위협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오버 아닌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수경과 변호사가 보인다. 한때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얼굴이었건만 지금은 꿈에라도 나오면 잠이 안 올 만큼이나 보기 싫은 얼굴이다. 사람의 양면성을 깨닫는 순간 이렇게 사람이 싫을 줄이야.
"2015머 8712 대여금 사건 원고, 피고 들어오세요."
"예" 마치 대학 다닐 때 리포트 검사 맡으러 교수실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쪽이 피고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변호사가 대답한다.
"사귀면서 주었던 것이라 대여금이 아닌 증여의 성격이 강하므로 원고의 청구는 기각되어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이 메시지나 카톡 등으로 보면 피고가 돈을 빌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아 그건 원고의 지속적인 채무 상환 요구에 의해 그렇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럼 원고가 물리적인 위해나 협박 같은 것을 했다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협박도 없었는데 자신이 직접 채무사실을 인정했다? 그건가요?"
"사귀던 사이였으니까. 원만하게 끝내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보시는 것이.."
"원고는 어떻게 생각해요."
"수경이 이렇게 될지 알았어."
"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요. 수경이 뭐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아니요. 그런 말은 없었어요."
"입금할 때는 확실하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피고 측에서는 얼마를 생각하는데요?"
"저희가 생각하는 최대치는 1,000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예? 뭐라고요?"
"원고 괜찮아요?"
"혹시 내 목소리가 들려요?"
"누구세요?"
이곳에서는 수경이 말고 여자는 아무도 없는데 환청이 들리는 건가? 내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결국에는 재판까지 가야 될 모양이다. 변호사를 구해야겠지만 우선 이곳에서 나가야 될 것 같다. 이곳은 귀신이 살던지 내가 지금 기가 허해 헛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결국 조정에 실패하고 재판으로 가기로 했다.
은애
수경이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법원으로 이동해왔다. 태어나서 법원은 처음 와본 것 같다. 처음 온 법원을 귀신으로 오게 되다니 내 인생도 참 묘하다. 내가 입금해준 100만 원에 주변 사람들한테 아쉬운 소리해서 변호사 비용을 마련했겠지? 아 지훈 씨다. 처음 만날 때 솔직하게 수경이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연애 초기에 그 사람의 단점은 그 어떤 말로도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눈을 모두 가리고 듣는 귀는 좋은 말만 들리며 심지어 그 사람의 체취는 향수보다 더 향기롭다. 근데 지훈 씨에게만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훈 씨 제 목소리 들리는 거 맞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미쳤나 봐."
"미친 거 아니에요. 저 은애예요. 수경이 친구."
"제가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내 목소리를 못 들었는데 지훈 씨에게만 들렸어요."
"들리는 거 알아요. 대답해봐요."
"대답 안 하면 계속 떠들 거예요."
확실하게 지훈 씨에게만 들린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빨리 움직이면서 내 목소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나야 생각만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 지훈 씨가 벗어나기는 힘들다. 이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좀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
"저한테 왜 그래요?"
"지훈 씨 정말 은애라니까요."
"말도 안돼 그쪽 말대로 죽었다면 어떻게... 이건 그냥 꿈일 거야."
"꿈 아니고요. 왜 지훈 씨한테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머 소원 같은 거 있는 거예요. 죽을 때 못 이룬 그런 거."
"흠.. 소원이요? 그런 건 딱히 없는데..."
"그럼 저한테 말할 필요 없잖아요."
"죽고 나서 처음 말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잖아요."
"모르겠고요. 전 지금 여행 갑니다."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요."
"저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수경이 만나고 되는 게 하나 없는데 이젠 귀신까지 붙네."
"수경이가 솔직히 너무했어요. 머 그렇게 사는 건 알았는데.. 말 못해줘서 미안해요."
"예 예.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전 머리 좀 식혀야겠어요."
"그래요 같이 식혀요."
"멀 같이 식혀요. 지금 떠날 거라니까."
그래. 내가 그동안 여행다운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있던가? 가티 떠나 보는 거다. 분명히 지훈 씨에게만 내 말이 들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갈 건데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
"어차피 갈 거 알아두면 좋죠. 지훈 씨도 심심하지는 않을 거고요."
"은애 씨랑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지훈 씨하고는 공통점이 있어요. 수경이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거죠."
"지훈 씨는 돈과 정신을.. 저는 수경이 때문에 죽었어요."
"예? 수경이 때문에 죽었다고요? 진짜요?"
"범인 얼굴은 알지만 누군지는 모르는 어떤 남자가 수경이를 죽이려다가 잘못 알고 저를 죽였거든요."
"근데 목소리가 슬프지 않아요."
"어차피 죽은 거 어떻게 해요. 그렇다고 해서 수경이 앞에 나타나 귀신처럼 보일 수도 없고. 범인은 누군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이렇게 지훈 씨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지훈
이 여자는 무한 긍정인가? 진짜 은애 씨 말대로 죽었다면 상당히 억울할 텐데. 머가 그리 즐겁고 밝은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은애 씨에 비하면 나는 천만 다행인가 보다. 적어도 돈은 좀 잃을지 몰라도 죽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이상한 여행이 될 것 같다. 귀신과의 동행이라.. 이건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건 그렇고 블루투스 이어폰이 있으니 다행이지 혼잔말로 이렇게 떠드는 걸 본다면 사람들이 날 미친 사람처럼 생각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