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Nov 20. 2017

상처

품을 때 나아갈 수 있다. 

살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의 인연만 이어나갈 수는 없다. 특히 피로 이어진 관계는 쉽게 끊을 수 도 없고 모른척하면서 사는 것은 더욱 어렵다. 어떤 상처는 생채기처럼 쉽게 잊히지만 어떤 상처는 복합골절이나 신체부위를 잘라내야 하는 중상으로 잊히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있다. 사람은 평생에 잊히지 않은 상처나 트라우마를 부모에게서 받는 경우가 많다. 인성과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그건 경제적인 것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이 없다. 물론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능력을 창출할 수는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아버지가 아버지 다울 때 어머니가 어머니 다울 때 그리고 어른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생각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 부모가 되었을 때 비로소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그런 가정 기준에서는 많이 떨어진 부모에게서 자라났다. 생각의 기반을 만들고 나아가기 전까지 적지 않은 고통이 수반되었다. 변화란 절체절명의 벼랑 끝에 몰려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에 난 상처는 아물면 아프지 않지만 마음에 난 큰 상처는 피가 벨만큼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러울 때는 확실하게 고통을 겪지 않고는 변할 수가 없다. 


사이코패스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와 스스로 죽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다와 죽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 쉽게 도움이 되지 않은 조언을 하던가 짧은 생각으로 재단해버린다. 


부모가 남긴 마음의 상처는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상처의 유형이 학대일 수도 있고 무관심이나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는 이기심일 수도 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차를 몰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펑크가 나면 그 위에 바로 때우지 않는다. 보통은 더 큰 구멍을 내서 구멍을 막을 수 있는 충진재를 집어넣어 때운다. 마음의 상처는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거짓으로 그 위를 덮는다. 그런데 그 상처가 옆으로 갈라지는데 다시 위에 덮는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원래의 상처는 곪기 시작하는데 사람을 안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준다. 그런 구성원이 늘어나면 사회는 자정능력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 


곪은 상처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주변의 부위를 같이 도려내야 할 때가 있다. 어른은 생각이 커진 사람이지 몸만 커진 사람이 아니다.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치유하는 방법 중에 일기 쓰기도 있다. 일기는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기를 통해 조금씩 엿볼 수 있다. 일기 쓰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혼자만 볼 수 있는 습작 노트 같은 것이 있고 이후에 자신의 콘텐츠로 사용하기 위해 쓰는 것이 있다. 후자는 주관적인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상처를 진심으로 같이 품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지만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