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지금은 고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영화 중 두 가지를 꼽으라면 굿 윌 헌팅과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일 것이다. 1989년에 개봉하여 개봉 당시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나중에 웰 메이드 영화란 것을 알고 감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 최근 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공감하는 것이나 오랜 시간 인기가 있는 영화나 책이은 다른 각도로 다시 한번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스마트한 세상이 왔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까. 직업이나 돈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열정을 만들지도 못하고 꿈은 더더욱 아니다. 열정을 가진 삶을 가진 사람과 희망과 꿈을 가진 사람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소설도 흐름이 있지만 그보다 짧은 시는 리드미컬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인생의 리듬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다. 성공과 지위, 명예 등만으로 줄 세우기를 하는 사회는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만 만드는 사회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라고 말한다. 고래 로마의 서정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의 카르페디엠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직역하면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다. 오늘뿐이니까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욜로족과는 좀 다르다. 그건 그냥 소모하는 것이고 키팅 선생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버려가며 오늘을 희생하지 말라는 의미다. 사람들은 지금 준비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준비를 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말이다.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만나면 그 미래에는 다시 먼 미래를 위해 희생시켜야 한다. 오늘은 영원히 없다. 오늘을 살고 있음에도 오늘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존 키팅 선생은 1859년에 창립된 미국의 명문 웰튼 아카데미에 새 영어 교사로 부임하는데 파격적인 수업방식을 통해 학생들을 변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서클이 다시 부활한다. 존 키팅 선생은 기존 질서에 반항하고 대항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길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는 참 스승이었다. 특히 교단 위에 올라가서 학생들에게 다른 각도로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필자가 지속적으로 찾으려는 다른 관점으로의 전환과 나 역시 아직도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를 대면하게 된다.
삶의 목적은 시와 미, 낭만, 사랑에 있다.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있는 순간 사람은 한 편의 시가 된다. 시로 살다가 시에 삶을 맡긴 사람이 있다. 한국의 시인중 굵은 흔적을 남긴 윤동주 조차 정말 닮고 따라 하고 싶었던 시인 백석은 많은 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다. - 백석 '흰 바람벽에 있어' 중에서
존 키팅 선생을 보면 시인 백석이 생각난다. 백석이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태도가 키튼이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진다.
존 키튼 선생은 부모의 그릇된 욕망에 의해 사랑하는 제자를 잃게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누군가에 의해 강요받은 학생들에 의해 전가받게 되기도 하지만 참된 선생의 모습은 포기하지 않는다. 삶은 시처럼 리드미컬하게 자신만의 걸음을 찾아 흘러가야 한다. 갑자기 추워진 세상에서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필자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기쁘게 생각하게 할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