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20대 중반부터인가? 분노조절이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대학 다닐 때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장학금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한 번 알바를 시작하면 공부만 할 수 있는 그런 은수저친구와 경쟁이 되기 힘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학점도 비교적 괜찮았다. 3점 중반을 항상 유지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고 TOEIC학원도 다녀야 했다. 10년쯤 앞에 선배들은 웬만하면 모두 취업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여자친구와는 잘되고 있어?"
"머 그냥 그렇지."
"그런데 그 알바 아직도 하는 거야?"
"뭐?"
"그거 있잖아 생체실험인가?"
"생체실험은 아니고 약이 나오기전에 최종 효능을 테스트하는 거지."
"그게 그거지 뭐."
"다른 거야. 내가 마루타냐?"
"하여간 안정성이 인증된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하겠어. 결혼은 해야 하고 서울에서 빌라에라도 살려면 투잡이라도 해서 돈은 벌어야 하니까."
"여자친구는 계속 그 일하고?"
"응 그 친구도 먹고살아야 하잖아."
"밤에 하는 일이라 힘들 텐데."
"그렇지 않아도 그만두고 싶어 하더라고."
"그 나이에 그만두면 다른 거 하기 힘들잖아. 마트에 취업하고 싶어 하지도 않을 테고."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낮에 하는 일을 하고 싶긴 하나 봐."
"갑자기 왜?"
"같이 동업하는 친구인가? 그 친구가 살해되었대."
"진짜? 대박이다. 범인은 잡혔대?"
"아니 아직 조사 중인가 봐."
서울에 뭐가 있다고 모두 서울로 몰려드는지 모르겠다. 확실하게 기회는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한경쟁으로 인해 집값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올라가 버렸다. 그나마 문화생활을 할 기회가 많다는 것외에 장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오래간만에 휴일에 데이트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번 신경안정제인가? 그게 이상하다. 내가 여자가 된 것도 아니고 감정이 우울했다가 갑자기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지기도 한다.
"오빠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온지 10분밖에 안됐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뭐?"
"음 오빠가 먹고 싶은 거면 아무거나."
여자가 아무거나라고 말할 때 가끔 짜증 난다.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라는 말은 없다. 남자가 생각하는 아무거 나와 여자가 생각하는 아무거 나하고는 의미 자체가 다르다. 여자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오늘 컨디션에 따라 입맛에 맞는 것을 정확하게 골라서 먹으러 가자라는 말이다. 게다가 동업하는 친구가 살해되고 나서 더 날카롭게 변한 것 같다.
"홍대에 가서 족발이나 먹을까?"
"홍대는 좀 멀지 않아? 그리고 낮에 왠 족발?"
"아니 여자 피부에 좋다잖아."
"내 피부가 별로라는 소리야?"
"그건 아니고 피부가 더 좋아지면 좋지."
"내가 이 나이 되었어도 피부미인이라는 소리는 듣거든?"
"그래 그래 다른 거 먹자."
"그냥 가까운데 가자."
"그럼 태능으로 장어 먹으러 갈까?"
"느끼한 게 안 당기네."
"그럼 네가 정해."
"짜증내는 거야? 나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오빠가 정하면 좋잖아."
"그냥 숯불갈비 먹으러 가자."
"그게 낫겠네."
벌써 사귄지 3년째이지만 쉽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 수희도 내 사정을 뻔히 알고 나도 수희사정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가지 괜찮은 것이 있다면 그쪽에 일하는 여자들처럼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비용 지출이 적다는 것이 다행이다.
"휴일이라 사람이 많네."
"이 집이 맛집이잖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 진짜."
"여기까지 왔잖아. 조금 기다려봐."
"무슨 낮에 이렇게 고기를 처먹겠다고 나와서 지랄이야."
"왜 그래? 갑자기"
"아 몰라.. 이상해 기분이."
"금방 자리 날 거야. 저기 빈 것 같은데 사장님 저기로 가면 되나요?"
"예 금방 치워드릴게요."
숯불에 구워먹는 숯불갈비는 가장 만만한 음식 중 하나다. 생고기이든 양념이 되어있든 간에 고기질만 괜찮으면 웬만한 맛은 낼 수 있다.
"오빠 좀 먹어봐. 맛있다."
"응 먹고 있어."
"오늘 이상해 보여. 그냥 생각이 딴 곳에 있는 것 같아."
"집 때문에 그런가 봐."
"집? 지금 살고 있는 집?"
"월세가 뭐가 그렇게 비싼지 미쳤나 봐. 전세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고."
"외곽은 싫어?"
"거기서 언제 서울까지 출근해."
"많이들 그렇게 살잖아."
"짜증 나니까 그만 말해."
"왜 계속 짜증만 내? 오빠 전에 신경쇠약인가? 그거 다시 재발한 거 아냐?"
갑자기 앞에 있는 수희를 죽이고 싶어 졌다. 저 앞에 있는 날이 잘 갈아진 가위로 목을 찌르면 어떻게 될까? 저 앞에 놀고 있는 아이의 목을 비틀어 버리면 얼마만에 죽을까? 기분이 점점 붕뜨기 시작한다. 수전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멈추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날 보며 웃는 것 같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과 무표정한 사람들 모두가 사라지면 행복해질 것 같다. 이건 분노도 아니고 흥분한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들어선 느낌이다. 어느새 내 손에 가위가 들려있고 앞에서 수희가 머라고 말하는데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수희를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 음식점 문을 열고 다른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정신이 점점 아득해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