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능화 벽화마을

건축학적으로 벽은 무언가를 지지하던가 땅의 경계선에 세움으로써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능적으로 접근했기에 보통 벽에는 그 어떤 것도 그려져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오래된 마을의 벽에 채색이 되기 시작했다. 벽은 칠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바래고 오래되어 보기가 싫기 마련이다. 사천은 고려 8대 왕인 현종과 그 아버지인 안 종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안종은 고려의 태자로 태조 왕건의 아들이다. 그런데 왜 사천에 현종과 부자의 상봉길 이야기

왕욱이 선왕의 왕후와 간통한 죄로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계비인 헌정왕후와 사통 하여 아들 대량원군 왕순을 낳게 된다. 왕순은 왕이 되기 힘든 그런 태생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에 등극하게 된다. 

 

사천에는 고려왕 현종과 아버지인 왕욱과의 만남을 기리는 부자 상봉길이 조성되어 있다. 유배된 이후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지던 왕순은 어느 날 성종의 명으로 왕순이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없어 아무에게나 아비라고 하는 것을 보고 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곳으로 와서 왕욱은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에서 아들 왕순과 함께 살게 된다. 

아버지가 정을 통했던 선왕의 계비로 헌정왕후와 왕순은 모두 태조의 손녀, 손자이니, 그들은 모자지간이면서 사촌 남매간이 되는 셈이다. 안종의 어머니 생모 신성 왕후는 신라의 왕족이자 경순왕의 사촌누이로 935년 11월 신라가 고려에 항복 의사를 표하며 시집보낸 여성이다. 이곳에서 자란 왕순은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현종과 아버지인 안종의 부자 상봉길에 있는 능화 벽화마을은 벽화를 활용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고 바다의 공간을 표현해서 사천의 매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릴 때는 아버지와 강제로 이별하고 커서는 여러 차례 천추태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될 뻔하는 위기에 처한 고려왕의 이야기는 아슬아슬하지만 부자상봉 이야기는 애틋하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피난 갔다가 환도하고 1012년에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해낸다. 천추태후라는 드라마에서 나오기도 했는데  1009년(목종 12) 서북면 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오른 것이 현종이다. 

이곳에 귀양 온 왕욱은 자신이 죽거든 이 금을 술사에게 주고 사수현 서낭당의 남쪽 구룡동에 장사 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으라고 신신당부한다. 성종 15년에 왕웅이 귀양지에 죽자 현종은 당시 6살이었는데 유언대로 장사를 지내고 개성으로 돌아간다.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른 현종은 8년 뒤인 1017년 4월에 귀룡동의 무덤을 건릉으로 이장한다. 

"그대와 같은 날(황도와 경기)을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는 감옥에서 스스로 한탄하지, 쇠사슬에 묶인 원숭이와 다름이 없다고. 정자에서 이별하며 돌아가는 그대가 부럽군, 그대는 새가 날 듯 말을 달리겠지. 제성(황제의 성, 즉 개경)의 봄빛은 꿈을 꾸는 듯 가물거리고, 해국(해변의 번국)의 풍광에 눈물이 옷을 흠뻑 적시는구나. 성주(성스러운 임금)의 한마디 말씀은 응당 고치지 않으려니 늙은이로 하여금 물가에서 물고기 잡다가 끝나치게 할 수 있다네" - 왕욱

당시 불륜을 통했던 헌정왕후는 경종이 사망하면서 궁에서 나와서 살다가 왕욱과 정을 통하게 되었고 아들 현종을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