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구속이 아니라 연대다.
먼저 이 책에 대해서 말해두면 쉬운 책은 아니다. 정의에 대해 속시원히 말해줄 것처럼 생각되었다가 별 흥미 없이 주제를 이끌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어렵게 풀어놓았다. 혹시 빚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자신한테 확 와 닿는 책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 책은 당신의 선택지에서 빼야 한다.
책은 마치 대학교수가 자신의 생각을 학문적으로 풀어놓은 논문에 가깝다. 대부분의 논문이 그렇듯이 의미 없는 이야기를 매우 복잡하게 써 내려간다.
난 빚의 마법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겨갔지만 그런 마법은 보이지 않고 빚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라는 저자의 주장만 구체화된 것만 보았다. 우리는 중세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아니 중세시대에도 빚은 있었다. 그것이 화폐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빚은 우리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 같은 존재이다. 대기업이 아무리 많은 사내 유보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빚 없이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다.
한국의 언론들은 위기감을 조장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불안감을 조장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가계부채 1천조 원 시대를 잊을만하면 각인시켜준다. 공기업 부채도 많고 정부부채, 지자체의 부채뿐만이 아니라 부채 없이 국가는 굴러가지 않을 만큼 부채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왜 책에서 빚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빚짐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빚을 지다의 줄임말처럼 보이는데 그리 입에 착착 붙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과잉 공급된 생산라인과 총수요의 둔화,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고평가 된 페이퍼 자산을 배경으로 여전히 계속되는 장기 침체를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전례 없는 속도와 역사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공공 부채의 축적에 의해 가능해졌다. - p 41
위의 내용은 책속에 삽입된 내용의 일부다. 경제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지 이해가 확 가는 표현은 아니다. 일부는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면 빚은 우리의 역사이며 고통스러운 통제라기보다 생산적인 '유대'로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점쳐보고 있다. 유대.. 이 말도 모호하다. 내가 진빚 혹은 이웃사람, 국가가 진 빚을 연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의미인가?
전 세계의 화폐경제가 실물경제를 넘어선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태울거리를 필요로 한다. 우선 돌아가야 하니 미래에 있는 화폐를 가져와야 한다. 세계경제의 엔진은 화폐를 태워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계가 1990년대, 2000년대에 한 번씩 발생했다. 1990년대는 국지적이었던 것이라면 2000년대는 전세게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물리학적으로 3차원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의 삶이 유지될 공간을 필요로 한다. 책에서 빚짐 공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질 들뢰즈의 표현으로 “인간은 더 이상 울타리 쳐진 인간이 아니라 빚진 인간이다”
절대적 빈곤은 아프리카나 제 3세계 국가에 한정이 된다. 한국사회가 망할 것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이 댓글을 달지만 망할 일은 없다. 그냥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더욱 빈곤 해질 테고 자본으로 인해 부가 늘어가는 사람은 더 늘어갈 것이다. 어쨌든 우린 살아간다. 그 속에서 빚이라는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새롭게 생각할 때가 왔다. 나는 빚이 부정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빚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빚으로 벌어들이는 가치보다 빚으로 나가는 비용이 큰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직장인이냐 사업가를 불문하고 말이다.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한꺼번에 몰아 닥치는 극적인 변화의 순간 어떤 상황이 처음에는 미미하게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극적인 순간을 뜻하는 Tipping Point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빚은 순간순간에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감정 없는 동반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