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현실적으로 생각하여야 했다. 과연 제약회사와 연결된 기업들 이 모든 것을 걸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생체실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이코의 뇌를 들어내어 검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놈을 조사해본 결과 병원에서 방사선사로 일한다는 것외에 주변 지인들도 거의 없었고 불우한 가정환경 같은 것외에 밝혀진 것이 없었다.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는 직원에게 물어본 결과 특이한 것이 하나 있다면 책임지지 않는 여성에 대한 극한 혐오를 가끔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일할 때만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런 증상은 심해지기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민 경위는 도준에게 물었다. "일개 형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만약 이걸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긴다고 하더라도 검사는 반려할 거고요."
"그럼 사이코가 조종받아서 살해했을 억울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하구요. 심지어 은애라는 사람은 대상도 아니었잖아요." 민 경위는 담배를 한 모금 마신 후 옆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박형사는 잘 몰라서 그래요. 단순히 제약회사 하나에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복잡한 관계예요." 도준은 마시던 캔커피를 힘껏 눌러 찌그러트린 후 쓰레기통에 힘껏 쑤셔 박았다. 빈 쓰레기통에서 요란한 소리만 울렸다. "그런데 지훈이라는 사람은 괜찮대요?" 담배를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넣으며 물어본다. "응급조치를 잘해서 그런지 생명에 지장은 없다는 것 같아요.
얼마나 오래 잤을까? 온몸이 욱신거림을 넘어 통증이 너무 심해서 눈이 저절로 떠진 것 같다. 희미한 불빛이 동공에 비치기 시작하면서 앞에 있는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수경이? 묘한 조합이다. 예전에 한 번 소개해준 적도 있는데 지금은 헤어진 상태에서 나 때문에 같이 한 공간에 있다니 말이다. "괜찮아 오빠?" 지훈은 신음소리가 먼저 새어나왔다. "음~" 타들어가는 듯한 목의 상태 때문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안 죽은 거지?" 지훈은 눈을 아래로 쳐다보며 칼로 찔린 곳을 바라보았다. "머 아직은 살아 있어. 그런 위험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명대로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오빠는 거길 어떻게 알았어?" 지훈은 뭐라 대답할지 몰라서 잠시 생각했다. 은애가 근처에 있는지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말이지. 아~ 혹시 귀신 같은 거 믿어?"
"뜬금없이 왜 귀신?"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은애 씨가 찾아왔었어. 그리고 지금도 간지는 모르겠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지훈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어릴 때 있었던 말을 했었어. 그래서 널 도와주러 간 계기도 된 거고 말이야."
"무슨 말?"
"어릴 때 은애 씨 아버지가 수경이 아버지한테 빚이 있다고."
"진짜 그런 말을 했어?" 수경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세한 건 몰라."
"그런데 은애 장례식이 내일인 거 알아?" 지훈은 수경이를 쳐다보며 진짜?라는 표정을 짓는다.
"사건도 해결되었고 하니까 내일 시체 인계받고 장례식 한다고 하던데?"
"어디서 하는데?"
"여기서 한다고 하던데."
"그럼 나도 가봐야지." 수경이는 놀란 표정으로 "미쳤어? 그 몸으로 어떻게 가려고. 링겔줄을 달고 가시겠다고?"
"절은 못하더라도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장례식장안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조용했다. 수경, 지훈, 도준, 민 경위, 그리고 친구들 몇 명이 자리를 지켰다. 은애의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오빠! 그런데 은애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왔다는 것이 대단해. 그런 용기가 있었어?"
"그럼 내가 보기보다는 불의를 못 견뎌해. 그래도 전에 사귀던 사람인데 위험하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오빠는 원래 소극적이었잖아. 그런데 살인범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걸 무릅쓰고 날 구하기 위해 왔다는 게."
"나도 사람 생명 소중한 건 알아."
"혹시 그 귀신이 되었다는 은애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고 한 거 아냐?"
"내가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할 사람이냐?"
"아니 좀 달라진 것 같아서."
"은애 씨가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했는데 전에 사귀던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내가 말했어."
"진짜?"
"응 위험하더라도 구하러 갈 테니까 도와달라고 했어." 어느새 지훈의 옆에는 은애가 와 있었다. "거짓말 잘하시네요. 그래도 용기 있었어요."
"저세상으로 간지 알았어요." 수경이가 지훈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수경이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만 은애 씨라고 표현한다.
"아직 뭐가 부족한가? 떠나지는 못했네요."
"은애한테 정말 미안했다고 전해줘요."
"못 소리는 다 들어요."
원래 은애 아버지와 우리 아빠는 친구 사이였다. 옛날에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사업을 했었는데 돈이 필요하던 은애 아버지가 우리 아빠한테 부탁해서 은애 아버지의 보증을 아빠가 섰다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렸고 도미노처럼 수경 아버지의 회사도 같이 망했다. 중학교 때까지 괜찮던 집안은 빚더미에 올라 앉았고 그때부터 생활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버클리 음대를 꿈꾸며 음악을 하던 수경은 모든 것을 포기했고 이전까지 친한 친구였던 은애와 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수경은 당연하다는 듯이 못 되게 굴었던 것 같다. 그것이 30대를 넘어서도 지속되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은애에게 돈을 빌렸고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은애는 항상 나에게 미안해했던 것 같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그 사람들 문제없겠어?" 회의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60대의 남자는 물었다. "예 더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을 거예요. 사건도 클로즈되었고요. 언론에서도 연쇄살인범을 잡은 걸로 보도했어요." 의자를 돌려 앉은 남자는 주먹으로 회의 테이블을 가볍게 세 번 정도 두드렸다. "그래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지. 민 경위 수고했어."
"그리고 죄송한데요. 제가 관계된 일에 보험같은것은 안들으셨으면 좋겠어요."
"보험이라니?"
"혹시나 몰라 보낸 3명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일을 망칠뻔 했어요."
"난 또 잘못되는지 알았지."
은애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화장장까지 간 수경은 도준과 걸어나온다. "원래 형사들은 피해자의 화장장까지 따라가나요?" 도준은 아무말 없이 걷다가 수경을 바라보며 "보통은 그렇지 않죠. 그냥 가는 모습이 보고 싶었어요. 제사건이기도 했고." 수경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본다. 자신의 차로 걸어가다가 도준을 돌아본다. "우리 다시보는일은 없겠죠?"
"아마도요. 그리고 형사를 봐서 좋을건 없잖아요."
지훈이가 있는 병실의 문을 열면서 들어간 수경이는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은애는 잘 갔어." 수경이 말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그냥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그럼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거야?" 지훈은 창밖을 바라보며 서있다가 절뚝거리며 자신의 침대로 걸어와서 앉는다. "글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다시 시작할까? 서로 숨기는 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숨기는 것이 없는 상태라. 수경이는 꿈 있어?"
"응 있었지. 꿈을 버린 후에는 되는대로 산거 같아. 그런데 다시 꿈을 가져보려고."
"우리가 같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나도 꿈을 가지고 너도 가지고 응원하면서 때론 기대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