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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7. 2018

육상의 이순신

하동의 영웅 정기룡 장군

하동 하면 공기 좋고 물 맑은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잘 알려진 하동의 인물은 적다. 그렇지만 하동에는 임진왜란 당시 통제사로 전쟁을 끝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과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다. 명인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은 1562년(명종 17) 당시의 곤양현(昆陽縣) 중평(仲坪), 곧 지금의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태어나 1622년(광해군 14)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통영의 진중에서 생을 마쳤다. 

맑은 날 하동의 정기룡 장군의 흔적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경쾌했다. 굳이 운동을 많이 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몸이 가벼운 그런 날이 이날이었던 것 같다. 이곳은 평일에도 주말에도 한적한 곳이다. 하동의 유명한 경치를 만나기보다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어서 조금은 차분해진다. 

정기룡 장군의 유허지 주변에는 데크길도 조금 조성되어 있고 생가터에 초가집으로 만든 생가가 있고 이곳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은 곤양 정씨의 시조다. 1586년에 무과에 급제했기에 임진왜란 당시에 참전을 했는데 당시 세운 전공에 대해서는 해전의 이순신(李舜臣)에 견주어 ‘육상의 이순신’이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기룡 장군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게 기록이 되어 있다.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친 명장인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목민관이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크고 작은 60여 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조선의 인물들을 보면 재력이 별로 없는 집안의 똑똑한 남자들은 보통 유력 가문이나 재력이 있는 처가와 결혼한 케이스가 많았다. 정기룡 역시 24세가 되던 해에 진주의 향리 강세정(姜世鼎)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인 강세정은 당시 진주에서 가장 부유한 향리였다고 한다. 그런 처가의 지원에 걱정 없이 무과를 준비하다가 1586년 25세의 나이에 무과 별시에 급제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간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었을 때 정기룡은 경상우도 지역의 전투에 참전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사천에는 선진리 왜성 등이 남아 있는데 사천성은 지휘관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퇴각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사천성 전투를 벌였는데 명군의 실책으로 패전했지만 자신의 병사들은 온전하게 유지하여 퇴각하였다고 한다. 



정기룡 장군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상남도와 특히 하동군에서는 설화에서 여러 번 언급될 정도의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기룡 장군의 탄생과 명마'에서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부인이 기르던 말이 정기룡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고 했던가. 최근에 많이 생각하고 있는 이슈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의 이야기 속에는 그의 신분을 낮은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도 많지만 특히 후원자로서의 부인 이야기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선견지명을 지닌 다는 것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의 일생을 보면 개인으로서 무리 없이 조선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였으며 그것은 이인으로서의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며 더 나아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동시에 지배 계급의 통치 이념을 구현하는 전쟁 영웅으로 자리하였다. 

육상의 영웅으로 불리던 정기룡 장군이 광해군에 의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도 묘한 인연이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을 때 삼도수군 통제영이 한산도에 있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삼도수군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지금 통영에 가면 삼도수군 통제영을 둘러볼 수 있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 전쟁 중의 공적을 세운 이들에 대한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책봉이 이뤄졌는데 정기룡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참록되었다. 성공한 민중적 영웅, 육상의 이순신, 전쟁영웅을 만든 것은 본인의 의지도 있었겠지만 그의 부인의 내조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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