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0일
1949년 살인범에 대한 첫 사형집행이 시작된 후 1997년까지 한국은 총 92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혼이 빠져나가버린 아버지의 얼굴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사형 전에 만찬을 즐기게 해준다고 들었는데 아버지는 한 수저도 안 드셨던 것일까? 이미 그 주인을 잃어버린 눈빛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공허감만 느껴진다. 항상 당당했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가 왜 이곳에 계신 것일까. 정말 나쁜 사람들만 사형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대체 무슨 죄를 진 걸까?
1일 전
김윤수의 사형을 집행하라는 집행명령서가 교도소장에게 전달이 되었다. 교도소장은 교도소 간부 4명을 불러 다음날 있을 사형집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도관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대부분 30일에 있을 사형집행에 빠지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순번이 정해진대로 강제로 할당할 수밖에 없다. 그 사형집행관중에 엄현철 교도관도 포함이 되었다. 보통은 월요일에 사형이 많이 집행이 되는데 이번에는 화요일이다. 이례적이긴 하지만 이번 정권 말기에 행하는 마지막 사형집행이니 급하게 결정된 모양이었다.
집행명령서와 함께 교도소에는 사신이 함께 날아온 모양이다. 검은색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교도소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다른 죄수들은 침묵하였고 사형수들은 다음날 있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사신의 커다란 낫이 그들의 목에 살짝 걸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김윤수가 있는 감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슴에 단 빨간색의 명찰은 이제 익숙해질 만 하니 작별인 모양이다. 김윤수는 무언가를 적어 하나는 성경책 뒤쪽의 공간의 사이를 찢어 넣고 아까 남겨둔 밥알을 잘 으깨서 잘 붙였다. 그리고 한장은 손에 쥐었다. 오늘은 숙면을 취하기는 글렀다. 분위기를 보니 내일은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인생에서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이 시간을 잠으로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죄가 있다면 받을 것이요. 그 진실은 누군가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태양의 햇살은 야속하게 교도소를 밝히기 시작했다. "김윤수 면회" 엄교도관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8시 이른 시간에 면회?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가 될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면회이길 바랬다. 1%의 가능성이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철창문이 열리고 엄교도관과 건장해 보이는 경관 2명이 같이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김윤수는 엄교도관에게 잽싸게 종이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엄교도관은 경관 2명의 눈치를 보며 몰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공간에 교도관들의 구두 소리만 울려퍼질 뿐이었다. 이렇게 복도가 짦았던가? 벌써 갈림길에 도달했다. 왼쪽으로 가면 면회실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형장으로 가는 길이다. 엄교도관은 김윤수를 이끌고 오른쪽으로 틀었다. "면회가 아니군요." 아무런 답도 없었다. 덤덤하게 이 상황을 맞으려고 했지만 다리의 힘이 조금 풀렸던 모양이다. 경관 한 명이 나를 잡아주었다.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날 때쯤 교무계장과 직원이 나를 인계하려고 기다리는 곳까지 왔다. 교도관 일행과 같이 형장으로 가는 길에 와이프와 아들의 얼굴이 스쳐지나 가듯이 앞에 환상처럼 보였다. 운명이 이렇게 이끌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집행장은 처음이다. 죄수로 집행장에 와서 치우는 사람들은 사형수들은 아니다. 경찰 생활하면서 딱 3번 정도 고문실에 가본 적이 있지만 그곳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저 안에 가만히만 있어도 어두운 그림자가 날 흡수해버릴 것만 같았다. 침묵만이 있고 그 어떠한 생명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백열등이 한 가운데 매달려 있었고 집행장의 바닥은 일부러 칠했는지 거무죽죽하기만 하다. 나를 데려간 엄 교도관은 나를 돗자리 위에 앉혔다. 나를 데리고 온 교도관 일행과 교무계장, 직원, 교도소장이 앞에 있었다. 교도소장은 서류를 하나를 보면서 나에게 물어본다. "사형수 김윤수, 본적은 서울 동작구 신길동, 현재 사는 주소는 서울 영등포구 양평1동, 1958년 5월 20 일생으로 올해 나이 39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1997년 4월 20일 영등포 경찰서장 박수찬 총경과 그 부인 김정은, 딸 박서희 양을 살해한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며 1심, 2심 사형,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고 1997년 12월 30일 지금 시간 8시 30분 법무부 장관의 명에 따라 사형이 집행됩니다. 마지막 유언이 있으면 말하세요." 대부분 사람들이 죽기 전에 유언이라면 침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유언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저의 마지막 유언은 죄가 있는 자는 죄를 받을 것이며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 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하던 간에 이 유언이 법정에서 유리하게 사용될 수도 없고 그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도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사형이 더 집행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경찰로 일하면서 많은 범죄자를 감옥에 넣었지만 그 옳고 그름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후회라면 후회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각기 사연이 있고 의도하지 않게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이렇게 저처럼 사형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솔직히 죽음과 직면해 있는 지금 침착하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너무 떨리고 제정신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와이프와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했지만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지 못한 와이프와 커서 예쁜 반려자와 인생을 설계할 아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말이 끝나자 교도소장은 목사에게 눈짓을 했다. 목사는 김윤수의 손을 잡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도를 올렸다. 성경봉독에 이어 찬송가 합창이 끝나자 목사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엄 교도관은 용수를 내렸다. 다른 직원들이 김윤수의 발목과 무릎, 두 팔을 겨드랑이에 꽉 붙이도록 묶었다. 두 사람이 뒤로 끌고 가자 다른 직원이 하얀 커튼을 걷어냈다. 커튼을 걷어내자 앞뒤로 긴 직사각형의 판자가 나타났다. 판자에 사형수를 앉히자 밧줄을 내려 김윤수의 목에 걸었다. 비슷한 연배의 엄교도관은 김윤수의 귀에 대고 "잘 가시게나. 다음 생에서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세." 엄교도관은 말을 한 뒤 재빨리 옆으로 빠졌다.
앞에서 대기하던 교도관 4명은 모두 같이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 직사각형 판자가 열리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격렬한 몸짓을 하면 온몸을 이리저리 흔들던 사형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경련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30여분쯤 지났을까? 의사는 줄에서 내려진 김윤수의 맥박 등을 살피면서 완전히 죽음에 이르렀나를 확인했다. 의사는 엄교도관에게 눈짓으로 공식적으로 사망했음을 알렸다. 엄교도관은 재소자들을 시켜 시신을 옮겼다. 사형이 구형되는 순간부터 김윤수의 손에 채워졌던 수갑은 죽고 나서야 풀어졌다.
아버지의 목에 걸려진 밧줄이 우리 모자의 인생에도 걸렸다. 누가 우리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인생에 사형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경찰 역사에서 순경 출신으로 가장 빠르게 경감을 달았던 사람으로 기록이 남은 아버지의 화려한 이력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언론은 뇌물 및 각종 비리와 연관되어 진급한 경찰이라고 근거도 없는 날조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의 비리를 알게 된 상관을 살해한 경찰의 스토리를 1면에 실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서는 누구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부녀회에서는 어머니에게 계속 이사 갈 것을 종용했다. 그런 사형수의 가족이 한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했다. 마침 겨울방학이라 학교를 옮기려고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지만 전학 가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이미 살던 곳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터라 구매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때론 사람들이 찾아와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 월급만으로 부족했느냐, 얼마나 잘 살고 싶었기에 그랬냐는 둥의 말은 애교에 불과했다.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어 112에 신고를 하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쪽으로는 잘 나오지도 않았다.
사람의 시선이 이렇게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었다. 아버지가 사형대에 올라 돌아가신 슬픔을 곱씹어보기는커녕 살아남은 우리 모자의 절망은 더 깊어져 갔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나서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당장 생계도 문제가 되었다. 살고 있는 곳에서 먼 곳의 일자리를 구하긴 했지만 거의 15년 만에 하는 일이라 상당히 힘들어하셨다. 저렴한 가격에 아파트를 넘기고 다른 곳에 이사를 간 우리 모자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모든 연락이 끊어진 상태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애들만 있는 중학교에 첫 등교를 하게 되었다. 중간에 전학 간 것보다 이렇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첫날 담임선생님이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김현철"내 이름이 호명되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네" 다행히 나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옆 짝꿍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물어왔다. "현철아 넌 이 근처 살지 않았지?" 무얼 아는 걸까? 괜히 의구심이 들었다. "왜? 내가 어디 살았는지 궁금해?" 장난기 있던 얼굴은 이내 이 친구 뭐야?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웃긴 놈이네" 거리를 두는 내 자세에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앞에 있는 친구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인 모양이다.
언론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사후 취재를 하겠다고 질기게 쫓아다녔다. 모자이크로 처리하고 확실하게 개인 신상을 보호해준다고 했지만 어느새 이사 간 지역의 주민도 조금씩 알아가는 눈치다. 일면 '나쁜 피 낙인'이 모자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학교 친구들도 아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