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1-06

Day 1997년 4월 20일

김경감의 삐삐에 숫자가 찍혔다. 우리 팀만 아는 그런 비밀 번호다. 1001011011?... 이런 번호가 있었나? 김경감은 지갑 안쪽에 들어있는 쪽지를 끄집어내어 확인하는 순간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음에 찍은 것은 10이라는 숫자. 1001011011라는 이진수를 십진수로 치환하면 603.. 이건 모든 것을 폐기하라는 뜻도 포함된다. 게다가 뒤에 10은 16진수로 A.. 박수찬 총경이다. 어제 나갈 때 댁으로 간다고 했으니 아마 자신의 집에 있을 것이다.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김경감은 중립에 놓여 있던 기어를 1단으로 집어넣고 U턴한 뒤 가속하기 시작했다. 이 숫자가 모든 팀원에게 보내졌을 텐데 대체 어떤 상황에 처한 거지? 허리에 있던 권총을 들어 총알을 확인하고 제 속도로 가던 차들 사이로 곡예운전을 시작했다. 여기서 영등포 박수찬 총경의 집까지 거리는 20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다른 팀원과 혹은 경찰에 연락하고 갈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경우 정도가 아니라 상황이 가장 위험할 때 이런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었다. 서장님은 살아계신 건가?


101 - 1100101 : 팀 미팅

102 - 1100110 : 장소 이동

301 - 100101101 : 출동

302 - 100101111 : 소각

401 - 110010001 : 긴급상황

603 - 1001011011-10,11,12,13,14,15 : Help


운전을 시작한 이래 가장 난폭한 운전을 하며 도착한 박수찬 총경의 집은 조용했다. 겉으로 봐서는 어떤 이상한 느낌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한쪽의 담을 넘어 조심스럽게 창문 쪽에 접근해서 안쪽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모든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있었고 그 안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현관문쪽으로 가서 문을 살짝 당겨보자 열려있다는 느낌이 왔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간 김경감은 입구에 쓰러져 있는 서장의 부인 김정은을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출혈이 있어 보였다. 목 아래에 손가락을 대보니 맥박은 잡히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피가 흥건한 현관을 지나 거실 쪽을 보니 인기척은 없었다. 총을 꺼낸 뒤 안쪽으로 들어가 안방 안을 살펴봤지만 헝클어진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상한 사람이나 시체가 보이지 않자 돌아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서는 이제 중학생이 된 서희가 칼로 난자당한 채 변기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서희의 목에 손가락을 대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긴지 오래된 듯했다. 그 현장을 수습해주고 싶었지만 먼저 박수찬 서장을 찾아야 했다. 1층을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2층으로 걸어올라 갔다. 총을 장전을 한채 총을 두손으로 잡고 아래로 향한 채 2층 마지막 계단을 밟고 돌아서는 순간 그곳에는 입에 테이프로 감겨진 박수찬 서장이 묶인 채 나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며 눈짓으로 우측을 곁눈질하는 순간 김경감은 둔탁한 둔기에 맞으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머리를 둔기를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멍하다. 내 손에는 총이 들려져 있었고 희미하게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묶여있던 박서장은 숨을 헐떡거리며 간할 적으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김경감은 물어 보었다. "서장님. 괜찮으세요?" 박서장은 입에서 나오는 피를 겨우 토해내며 "미안하네." 온몸에 조금씩 감각이 돌아온 김경감은 서장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숨 쉬는 것도 버거운 듯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숨을 고른 후 "자넨 함정에 빠졌어. 그리고 이번 수사도 끝이고.. 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그 방법만이 살길이야." 김경감은 주변에 전화를 찾으면서 "잠시만요. 제가 119에 신고할게요." 고개를 간신히 들은 박서장은 "이 세상이 모두 자넬 쫓을 거야. 모르지.. 벌써 경찰이 와있을지도..."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이 박서장을 쳐다보다 아래를 쳐다보았다. 탄피가 하나 떨어져 있었고 한쪽에는 살인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칼이 떨어져 있었다.


김윤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벌써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사이렌 소리도 같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쏜 총에 맞은 박서장과 내 지문이 묻었을 저 칼... 아니 지문이 묻지 않았더라도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은 없었다.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보니 벌써 경찰 한 개 중대는 와있었다. 현장은 사시 출신 특채로 들어온 서경정이 지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팀원들 대부분도 도착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확성기를 두드리던 서경정은 "아! 아! 김윤수 경감 안에 박서장 가족은 괜찮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언제 인질극이라도 했단 말인가?


"내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지막 말을 한 박서장은 고개를 떨군다. 김경감은 힘 없이 박서장 옆에 털썩 주저 않았다.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너무 빠르게 모든 것이 일어났다. 집은 앞뒤로 포위되어 빠져나갈 공간은 없어 보였다. 잡히면 뇌물.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씌울 테고 그 사실을 안 박서장 가족을 몰살했다. 빠른 진급보다 더 빠른 추락은 불을 보듯이 자명했다. 이곳에서 더 이상 버틸 이유도 없고 버텨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커튼을 열고 다시 한번 바깥을 확인했다. 경찰뿐만이 아니라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와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기자까지 와있는 거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9시 30분쯤 정신이 들었을 때 시간이 10시, 지금 시간이 10시 10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경감 이제 그만 투항해. 더 이상의 저항은 무모해." 서경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면서 권총을 손위로 든 김경감이 걸어나왔다. 기자들의 스트로보가 터지기 시작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달려들어 김경감의 총을 빼앗고 수갑을 채웠다. 기자 한 명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김윤수 씨 왜 그런 겁니까?" 경찰들은 잽싸게 현관문에서 주변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기자들의 접근을 막기 시작했다.


민 경위와 박 경사가 경찰들 속에서 그에게 접근하려고 하자. 김윤수는 둘을 바라보며 오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민 경위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둔다.


취조실에서 서경정과 김경감은 마주 앉았다. "김경감... 아니지 김윤수! 박서장은 그렇다 치고 왜 일가족까지 살해한 거야" 김윤수가 아무말 없이 있자. "어차피 증거도 확실하고 당신 통장에 차명으로 입금된 증거도 있어. 4억이나 되더만... 내 사과에서 당신을 내사한 자료가 다 넘어왔어. 순경출신 주제에 당신 잘 나갔었잖아." 김윤수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수갑찬 손을 책상에 올려놓는다.

"내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믿어주겠습니까?"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 사건도 드물어.. 앞뒤가 딱딱 맞잖아. 우리 시간낭비하지 말자고. 자 조서 쓰자. 언제부터 돈을 받은 거야? 이거 말고도 더 있지? 그리고 박서장은 언제 그걸 알게 돼서 그렇게까지 하게 된 건지.. 조서 많이 써봤잖아. 지금 정황만 보더라도 보나마다 당신 사형이야."

"담배 한대 필수 있어요?" 담배를 안핀지가 10년이나 되었는데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이 담배 피우는 거라니.. 서경정은 담배를 꺼내 하나를 건네준다.


21일 일간지의 1면에는 모두 김윤수의 기사가 실렸다.

"부패경찰 박서장 일가족을 살해."

"경찰의 가면을 쓴 연쇄 살인범"

"전 국민 경악시킨 경찰 살해범"

"금전 만능주의가 빚어낸 한국사회의 민낯"

특정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김윤수의 신상은 전국에 알려질 테고 그 가족도 그 여파에서 피해나갈 수는 없었다. 벌서 경찰들이 들이닥쳐 김윤수의 집은 모두 뒤집어놓은 상태였다. 검찰 수사가 완료된 것도 아닌데 이례적으로 대통령이 발 빠르게 기자회견을 하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을 국민을 위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20일 비극적인 사건이 경찰 조직에서 발생했습니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어야 할 경찰이 부정부패에 얽혀 자신의 상관을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일가족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반세기 만에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민주주의 사회를......


...... 극악무도한 범죄가 모두 드러난 만큼 확실하게 여죄 여부를 밝혀 이에 합당한 판결을 내려 국민 여러분의 불안과 불신을 종식시켜주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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