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11
잡지 에디터라고 하면 참 그럴 듯해 보이지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그런 독특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요즘 잡지들은 협찬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협찬능력도 필수고 마감이 가까워지면 매일 야근은 필수고 잠을 자는 것은 사치라고 할 정도다. 신문기자야 사실에 근거에 논지를 세우고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잡지 에디터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리고 화면 구성을 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참 바쁘기 시작할 때 잡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은 최악이다. 그런데 그것이 떨쳐버릴 수 없는 일이라면 두 가지가 겹쳐 날 슬럼프에 몰아넣기도 한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생각 없이 2003년 11월 11일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1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날이다. 차사고로 돌아가셨던 날 세상은 별별일이 일어났고 누군가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중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이 그때쯤 발생했었다. 지금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형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이다. 사형제가 있다고 해서 살인을 하지 않고 끔찍한 범죄건수가 줄어들까? 살인이 주는 희열감을 감히 상상해볼 수도 없지만 인간의 힘으로 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회제도가 그걸 막기는 힘들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죄인의 목숨을 끊는 형벌과의 차이는 바로 죄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동일하다. 죄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고 국가마다 다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죄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도 접한 바 있다.
더군다나 아버지 말이 사실이라면 오판에 의한 사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영원히 구제될 수 없다. 확신이 되는 흉악범을 사형함으로써 법익 보호의 목적을 달성하고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격리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사형이 신중을 기해 내려지기 때문에 오판의 염려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사법신뢰도가 높은 건가? 사법신뢰도가 높지 않으면 그 형을 집행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건 아닌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최 과장 뭐해?" 이 차장이 커피를 들고 지나가다가 내 모니터를 본 모양이다. 항상 술자리에서 "내가 최 과장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상사다.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해준 것 같지도 않은데 특별하단다.
"아 예. 잠시 무좀 볼게 있어서요."
"이번 마감 기사는 잘되고 있어?"
"예. 내일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40에 가까운 나이를 먹은 여자 상사. 이상은 TV에서 나오는 유명한 모 에디터를 꿈꾸지만 현실은 고르고 고르다가 아직 시집 못 간 여성.. 우리는 주차장 이론에 딱 맞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사람 많은 주말 마트에 갔다가 주차장에 들어선다. 같은 층에 좋은 자리를 점하기 위해서 조금 더 돌다가 아까 본 자리를 놓치고 다시 아래층으로 가게 되는 현실. 고르고 고르다가 더 좋은 사람이 있겠지라는 꿈을 꾸지만 그나마 한두 가지 부족했던 사람도 누군가 채간다. 그러면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것처럼 눈도 같이 저 밑으로 내려가게 된다. 갑자기 무슨 생각하는 거야. 창을 닫고 편집 프로그램을 띄우려는 순간 모니터에 눈에 끌리는 기사가 있다.
2013년 11월 11일 이날의 황당한 일이라는 기사. 앞에 이니셜을 보니 느낌이 묘하다. 만취해 운전하던 여자 경찰 트럭과 정면충돌로 숨지다. P 모 경사라면 혹시 그 사람인가? 게다가 숨진 장소가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곳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설마 그 사람일까. 현은 자신의 외투를 뒤져서 쪽지를 꺼내본다. 믿을만하다는 사람 중에 하나인 박민희 경사.
사람이 없을만한 한적한 곳에 두 명의 여자가 차 안에 묶인 채로 있었다. 두 사람은 네 명의 남자가 밖에서 지키고 있었고 한 명의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처리할 거야?" 머리가 짧고 다부진 몸매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통통한 몸매에 눈매가 비열해 보이는 남자를 쳐다본다.
"적당하게 처리하고 언론에 흘리면 되겠지. 여자 경찰은 술 먹인 다음에 처리하고 다른 여자는 도로에서 처리하자고."
"문제는 없겠지?" 이곳 근방 1km는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어서 진입하는 차는 없는 상태였다. "우선 여경찰이나 데리고 나와. 그 경찰은 내가 처리할게." 여자 경찰은 다른 남자의 손에 이끌려서 눈이 가려진 채 끌려 나왔다. 남자가 눈짓을 하자 여자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살려주세요." 재갈이 풀리자마자 박민희는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그냥 조용히 있으면 명대로는 살 거 아냐. 당신이 설치는 통에 내가 안 해도 될 일을 해야 하잖아."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우리가 모를 거 같아? 다른 말 필요 없고 목마를 텐데 이거나 우선 마셔." 다른 남자가 박민희의 얼굴을 잡고 입을 강제로 벌렸다. 남자는 위스키를 여자의 입안에 쏟아 부었다. 반쯤은 밖으로 흘러나왔고 반은 목구멍 안으로 강제로 흘러들어갔다. 숨이 막히듯이 괴로워하던 박민희는 3병쯤 부었을 때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술에 취한 여자를 준비된 승용차 운전석에 넣은 뒤 풋 브레이크를 풀었다. 약간 경사가 있던 곳에 세워져 있던 차는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살짝 핸들을 풀어놓은 터라 차는 미끄러지기 시작한 지 3초쯤 지났을까? 중앙선을 넘어 미끄려져갔다. 앞에서 올라오던 트럭은 박민희가 탄 승용차를 그대로 박고 앞으로 나아갔다. 승용차의 본넷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좌측 휀다는 할 것 없이 바퀴축은 순식간에 부러졌다. 10초쯤 끌려가던 차는 엔진이 핸들을 밀면서 들고 간 후 박민희의 갈비뼈를 부러트렸다. 부러진 갈비뼈 하나가 심장을 찌르면서 박민희는 즉사했다.
다른 여자는 왕복 6차로의 도로 가운데 놓여있었다. 도로 양쪽에는 SUV 차량 한대와 승용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재갈이 풀린 여자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눈이 가린 여자는 인도 쪽이 아닌 움직이기 시작한 SUV 차량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횡당보도가 없는 그곳에서 70km로 달리던 SUV에 받힌 여자는 중앙선을 넘어가서 쓰려졌고 반대편 승용차는 그대로 밟고 지나가버렸다. 여자를 밟고 지나간 승용차에서 내린 쓰러져 있는 여자의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아직 죽지 않았지만 생명의 기색이 동공에서 사라지는 듯한 여자는 겨우 마지막 날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여자를 쳐다보던 남자는 숨이 끊기기까지 저승사자처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10여분이 지났을 때 더 이상 여자의 가슴이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자 주변에 떨어진 차량 조각들을 챙긴 다음 유유히 차를 끌고 사라졌다.
현철은 늦은 시간에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주변 지인들도 없고 그나마 만나는 사람은 이모 가족 정도였다. 얼마나 기다렸던 것일까? 눈을 떠보니 벌써 시간은 7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이모집에 전화를 해봤지만 그곳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를 가기 위해 주섬주섬 준비물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여느날과 다른 하루지만 기분은 별로 좋지 않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6교시쯤 되었을 때 이모부가 교실을 찾아왔다. 한 번도 학교로 찾아오지 않았던 이모부가 교실로 찾아왔다면 이건 엄마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설마 큰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이모부의 표정이 생각보다 훨씬 어두웠고 이모부와 같이 간 병원의 영안실에서 만난 것은 생명이 빠져나가버린 엄마의 육신이었다. 세상에 이제 나 혼자뿐이다. 이모는 날 안아주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생전 처음 본 것 같다. 눈물은 나오지 않은 소리 없는 울음이 속에서 터져나왔다. 그냥 주저앉아 손바닥을 차가운 영안실 바닥에 대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